삶의 이야기

[홍헌표의 암환자로 행복하게 살기]즐겁게 걸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

부산갈매기88 2011. 4. 29. 0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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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헌표 디지털뉴스부 차장

2박3일 항암제 맞으며 몸도 마음도 지쳤을 때
잡념 털어내려고 병원 복도 걷기 시작
복직 후엔 걷기·운동 빼먹는 날 많아져
마음 다시 다잡고 주 2~3일은 걸어서 출근

항암치료를 받을 때였습니다. 2주에 한 번씩 병원에 입원해 2박3일간 주삿바늘을 꽂고 지냈습니다. 항암제의 독성(毒性)이 워낙 강해 입 안이 헐고, 구역질 때문에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했습니다.

항암제와 수액이 계속 들어가다 보니 소변 횟수가 늘어나 한밤중에도 두세 시간마다 한 번씩 화장실을 드나들었습니다. 숙면을 취할 수 없었습니다. 가뜩이나 불안한 마음에 힘은 없고 머리는 멍한 상태가 계속됐습니다. 침대에 누워도 편치 않고 책을 봐도 글이 눈에 잘 들어오질 않았습니다.

몸도 마음도 지친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가을이 깊어가는 창 밖 풍경을 보며 마음을 달래기도 했지만 죽음, 이별 같은 부정적인 단어만 자꾸 떠올랐습니다. 어떻게든 버텨야 하는데 10분이 1시간처럼 길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걷기였습니다. 제가 입원한 병동에는 항암 치료를 받는 환자들이 주로 모여 있었는데, 아침 6시만 되면 항암제나 수액 봉투를 바퀴 달린 걸개에 걸고 복도를 걷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머리를 빡빡 민 50대 남자는 식사 시간 전후로 1시간씩 부인과 함께 씩씩하게 병동을 누비고 다녔습니다.


그의 밝은 표정을 보고 자극을 받아 저도 왕복 거리가 150m 남짓한 복도를 열심히 걷기 시작했습니다. 가끔 문이 열린 다른 병실 분위기를 훔쳐보기도 하고, 복도에서 마주치는 다른 환자들과 눈인사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당시 제겐 걷기가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잡념 털어내기의 수단이었습니다. 병동을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을 재고, 발걸음 수를 세다 보면 부정적인 생각을 잠시 잊을 수 있었습니다.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걷는 속도를 높이다 보면 시간이 더 잘 갔습니다.

하지만 몸이 따라주질 않았습니다. 점차 걷는 일이 고통으로 다가왔습니다. 잡념만큼 저를 괴롭힌 것은 병원 특유의 냄새였습니다. 항암제로 위장이 뒤집어진 탓인지, 식사 시간의 밥 냄새는 정말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소변을 볼 때마다 몸에서 빠져나오는 약 냄새로 헛구역질을 할 때가 허다했습니다. 구역질이 나서 수저를 내려놓을 때면 옆 침대의 보호자는 "잘 먹어야 약 효과가 높다는데, 억지로라도 먹으세요"라고 위로해줬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밥 한 숟가락 뜨지 못한 채 슬그머니 병실을 빠져나와 복도를 걷곤 했습니다.

그렇게 버티다가 퇴원하면 기분이 날아갈 듯했습니다. 달라진 것은 오직 병원 밖으로 나왔다는 것일 뿐인데, 몸과 마음이 그렇게 다를 수 없었습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야트막한 산이 있는데, 여전히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해 어지럽기는 했지만 가벼운 발걸음으로 오르곤 했습니다. 병원만 아니라면 몇 시간이라도 걸을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렇게 열흘을 지난 뒤 또 입원해서 '악몽 같은' 2박3일을 보내는 일이 반복됐습니다.

"더 이상 입원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온다면 정말 즐겁게 걷기 운동을 하겠다"는 맘을 먹게 됐습니다. 지난 2년 반의 휴직 기간 중에는 그대로 됐습니다. 아침 5시 반에 일어나 동네 한 바퀴 돌고, 아침식사 후엔 집 청소를 마치고 왕복 1시간 반쯤 걸리는 공원까지 부지런히 오갔습니다. 새 소리 들리는 숲 속에서 스트레칭과 명상, 태극권을 하는 시간도 상쾌했습니다. 1시간 이내 거리는 버스나 지하철을 타지 않고 걷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복직을 하니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아무리 신경을 써도 제 몸을 챙길 시간이 이전보다 줄었습니다. 매일 아침 20분 이상 걷기와 스트레칭을 하고, 1주일에 두세 번은 헬스클럽에서 근육운동을 하기로 마음먹었지만 갈수록 빼먹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이래선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 핑계거리를 찾자면 수없이 많지만,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것부터 다시 착실히 실천하자고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스트레칭은 1분만 제대로 해도 경직된 근육을 풀어주고 혈액 순환을 좋게 해줍니다. 혈액순환이 좋아지면 피로감과 스트레스가 줄어듭니다. 매일 1~2시간에 한 번씩 머리부터 발가락까지 스트레칭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주일에 2~3일은 걸어서 출근하고 있습니다. 자동차 매연을 덜 마시면서 한적하게 걸을 수 있는 코스도 있고, 청계천을 따라 걸을 수도 있습니다. 등과 온몸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손가락, 발가락 끝까지 따뜻한 기운이 감돌면 엔도르핀이 팍팍 돕니다. 걷는 동안 잡념을 하나둘씩 털어낼 수 있는 것도 걷기의 또 다른 장점입니다. 이왕이면 숲과 산에서 걷고 싶지만, 또 다른 핑계거리가 될까 봐 도심 걷기에 재미를 붙여볼까 합니다.

 

 디지털뉴스부 차장 bowler1@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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