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식히기

정신세계를 뛰어넘은 내리사랑

부산갈매기88 2013. 2. 4. 07:10

내게는 슬픈 단어가 하나 있다. 서른 일곱 해를 살면서 말라버린 듯한 눈물샘을 자극하는 시 같은 단어 하나, 할머니 ….


외할머니는 내가 태어날 때부터 줄곧 함께 계시다가 대학 2년 때 돌아가셨다.
초등학교 때 구구단 하나 제대로 외지 못하던 나는 칭찬거리를 연구하고 연구하다가 어느 아동문학가의 짧은 동화 하나를 베껴서 할머니에게 보여 드렸다. 그걸 보시며 눈물을 글썽이시던 할머니의 모습을 아직도 나는 잊지 못한다.
"그려, 그려. 그눔의 구구단 비둘기나 먹으라 하지. 넌 꼬옥 이름 날리는 소설가가 될껴, 암! 내 새낑께."
그 후 나는 할머니의 믿음에 한번도 보답하지 못했지만 나에 대한 그분의 믿음은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변함이 없었다. 아, 할머니!


고등학생 시절 친구들이 집에 놀러 왔다. 마루에 친구들과 함께 올라서자마자 뭔가 기어서 다가오는 존재가 있었다. 당시 할머니는 치매에 걸려 있었다. 예민한 학창시기였던 나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창피했다. 짧게 민 머리, 남자 내복, 퀴퀴한 냄새 … 친구들이 볼까봐 할머니를 발로 차듯 방안으로 밀어 넣었다.
자신의 이름도, 딸의 얼굴도 구분 못하시던 할머니가 기어 나오신 이유를 나중에야 알았다. 어떻게 아셨는지 사랑하는 손자의 친구들이 왔다는 걸 알고 밥을 차려주기 위함이었다니 ….

- 최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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