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방

차별대우

부산갈매기88 2014. 7. 30. 08:04

오승재씨가 쓴 "소설 우리 예수님"이라는 소설책이 있습니다. 그 중에 "제일 교회"라는 단편 소설이 있습니다. 교양 있는 사람들이 다니는 교회입니다. 엘리트 신앙인들이라고 생각하는 제일 교회 교인입니다. 아주 잘 지어졌습니다. 문화시설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주일에 헌 누더기를 걸치고 왼팔이 없는 누더기 옷을 입은 거지가 봇짐을 걸머진 채 교회에 들어옵니다. 안내를 보던 남 집사가 떠밀어냅니다.

"나 예배 보러 왔소"

"이런 꼴로 예배 보면 안 된다."며 송 집사는 백 원 짜리 하나 쥐어 주고 보내려고 합니다.

 

이 때 부목사가 "어디서 왔소." 물어봅니다.

 "예배 보는데 어디서 온 게 무슨 상관이요, 나 집이 없는 줄 뻔히 알지 않소."

"누구 소개로 왔소"

"거리에서 예수 믿으라는 말 듣고 왔소."

 

부목사는 들여보냈습니다. 송집사는 헌금 훔치러 왔으니 보내자고 합니다. 그 주변에는 아무도 앉지 않습니다. 부목사가 나가면서 인사합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이요. 그럼 다음 일요일에 많은 친구들을 데려 오겠소."

 

거지들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다음 주 헌금 시간에 헌금바구니를 그 앞에 돌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헌금할 수 없소."

 

당회에서 구제비 주고 못 오게 하였습니다. 어느 날 한 거지아이가 "우리 아저씨가 목사님 데리고 오라고 했어요"라고 급히 말합니다. 부목사가 가보니 다리 밑에서 가마니로 가리고 사는 천막에 희끄무레 죽은 시체 같은 몸이 누워있었습니다. 그는 죽은 듯 소리 없이 한 쪽 손을 들려고 하였습니다. 손에는 꼬기 꼬기 꾸겨진 100원 지폐가 있었습니다. 그는 무엇인가를 말하려다가 끝내 말을 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오늘날도 교회 내에서도 학력, 미모, 재력, 지위, 건강, 인종, 성별 등으로 차별대우를 할 수 있습니다. 한국 사회학회 기관지인 [한국 사회학]에 발표한 서석재씨의 [중산층 대형교회론]이라는 논문이 있습니다. 그 논문에 의하면 요즈음 기독교 신자들이 새로 교회를 선택할 때 교회의 유명도나 신도들의 사회 경제적 수준 등을 기준으로 삼는 경향이 확산되고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목사의 설교 내용이나 교단의 교리, 집과의 거리 등을 주로 감안해 교회를 선택했던 과거와는 달리 대형교회 신자들 중 상당수는 소속한 교회가 [수준 높은 식자층과 중산층들이 다니는 교회]로 사회에 알려져 있어 교회에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교회 신자가 됨으로써 자신도 중산층으로 동일시 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교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지 않고 비교적 편하게 다니고 이런 교회 정도는 다녀야 사회적 체면이 선다는 식의 [지위상승 욕구]나 [나도 중산층]이라는 소속감을 가지려는 신자들의 성향이 이런 교회를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출석교회를 통해 교인들의 지위가 달라지는 [교회의 사회적 지위분리]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국회의원이 다니는 교회, 어는 재벌, 어는 유명인, 어느 유명한 목사가 목회하는 교회, 어느 연예인, 어느 교수 등등으로 차별화와 계층화시켜 "당신 같은 사람들이 왜 우리 교회에 나와"라는 식의 의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 누구도 차별대우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입니다. 위대한 선지자 사무엘도 차별 대우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외모만 보고 다윗을 기름부음에서 제외시키려고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약2:1)”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신분으로 차별대우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배고픈 사람들, 멸시와 천대를 받는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의 친구였습니다. 당시 아무도 상대하지 않고 부정탄다고 생각했던 문둥이, 간음한 여자, 부정한 병에 걸렸다고 생각하는 혈루증 앓은 여인, 심지어는 죽은 자,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자, 병든 자, 세리들의 친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예수님을 대적하는 바리새인들도 차별대우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을 인정하였습니다.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막 12:14)" 좋은 시계를 차고 있다고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외적인 것도 무시할 수 없지만 인간의 가치는 외적인 데에만 있지 않습니다. 생명은 생명으로 존귀합니다. 인간의 참된 가치는 인간 그 자체에 있습니다. 한 사람이 우주보다 더 귀한 존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셨기 때문에 존귀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외모만 보고 차별대우를 하는 것은 사랑의 법에 위배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약2:8-9)”

섬기는 언어/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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