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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자영업에 '천하제일'은 얼마나 되나

부산갈매기88 2018. 7. 25. 07:01

예전 세대는 일본에서 소니 전자제품을 샀다
요즘 세대는 일본 자영업이 만드는 작은 '천하제일'을 산다… 본질은 실력이다

선우정 사회부장
선우정 사회부장

2007년 일본에서 특별한 언론 보도를 접했다. 도쿄 이케부쿠로에 있는 한 라면집 이야기다.

46년 동안 라면을 만들던 주인의 다릿병이 악화됐다. 더는 주방에 서 있을 수 없게 되자 폐업을 결정했다. 문을 닫는 날 전국에서 라면 팬이 몰렸다. 수백 명이 가게 앞에 긴 줄을 이뤘다. 저녁이 되기 전에 400그릇이 동났다. 주인이 문을 닫으러 나왔다. 일본에선 폐업하는 것을 '노렌(暖簾·입구에 깃발처럼 치는 포렴)을 내린다'고 한다. 팬 수백 명이 이 광경을 보기 위해 가게 앞을 떠나지 않았다. 주인이 포렴을 내리고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팬들이 소리쳤다. "아리가토(감사합니다)!"


일본에서 본 두 가지 언론 보도가 가슴에 남아있다. 하나는 2011년 동(東)일본 대지진 보도다. 1만8000명이 숨지고 원전이 파괴되는 대참사에 언론은 냉정했다. 세월호 사건 때 한국 언론처럼 했다면 일본은 그때 무너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하나가 라면집 폐업 보도다. 주인은 라면 한 그릇을 '세계 최고'로 만드는 데 일생을 바쳤다. 그러다 건강이 무너져 은퇴하는 그를 향해 언론은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신문은 사회면 톱기사로 다뤘다. 방송은 헬기를 띄워 가게 앞 행렬을 생중계로 전했다.

주인은 100명이 넘는 제자를 길렀다. 말이 제자이지 경제적 위치는 최저임금을 받는 주방 보조 아르바이트만도 못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독립을 꿈꾸면서 스승의 노하우를 배웠다. 일본에선 이 과정을 '노동'이 아니라 '수업(修業)'이라고 한다. 주인은 독립하는 제자들에게 '노렌와케(포렴을 나눈다는 뜻)'를 허락했다. 독립해 분점을 만들 때 스승의 상호를 무상으로 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는 3년 전 세상을 떴다. 하지만 그가 남긴 상호 '大勝軒(대승헌·다이쇼켄)' 석 자는 제자들의 수많은 '노렌' 위에서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자영업이 일본에서 진화하는 방식이다.

10년 전 일본 특파원 후반기에 도쿄 서부의 작은 동네에서 살았다. 대형 상권에 끼여 출퇴근 시간대 급행 전철은 건너뛰는 곳이다. 이런 곳에 강한 가게가 많았다. 특히 빵집이 대단했다. 70년 넘은 빵집이 있었고 천연효모를 만들어 전국에 이름을 날린 빵집도 있었다. 어떤 곳은 홀로 구워낸 빵을 양만큼 팔고 문을 닫았다. 입간판을 치우면 살림집으로 돌아갔다. 기업형 빵집 체인점보다 비싼 빵을 팔았다. 독창적이라 가능했다. 주민들은 그 독창성에 제값을 지불했다.

20년 전 살던 도쿄 오타구(區)엔 로켓의 상단 부분을 만드는 작은 공장이 있었다. 사장에 종업원 십여 명인 동네 공장이었다. 대기를 뚫고 우주로 돌진하는 로켓 상단의 미묘한 곡면이 공장 사장의 손기술로 완성됐다. 사장이 커다란 봉을 들고 곡면을 다듬는 끝손질 작업은 원시적이었기 때문에 인상적이었다. 그 원시성에 표준화할 수 없는 기술의 미묘함이 숨어 있다. 식당이나 제조업이나 자영업의 생명은 대자본이 돈으로 따라 할 수 없는 독창성이다.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유학자 강항이 당시 일본에 대해 쓴 책 '간양록'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일본은 어떤 재주, 어떤 물건이라도 반드시 천하제일을 내세운다. 벽을 칠한다, 지붕을 인다, 도장을 찍는다는 따위에 천하제일 명패가 붙으면 금이나 은을 30~40정쯤 내던지는 것은 예사다.' 일본 자영업은 400년 이상 이런 토양에서 성장했다. 이런 나라의 자영업조차 인구 감소와 고령화, 신세대의 가치관 변화에 밀려 축소되고 있다고 한다.

우리 자영업은 일본에 비해 뿌리가 깊지 못하다. 그럴수록 알아주고 응원해야 하는데 반대로 간다. 소비자는 대자본의 독식(獨食)을 비난하면서도 어떤 분야든 이들의 상품을 선호한다. 수도권 가게 임대료는 일본 수준을 넘어섰고 임금도 일본 수준에 다가섰다. 자본, 지주(地主), 정부가 동시에 자영업을 공격한다. 이런 정부가 자영업 담당 청와대 비서관을 새로 둔다고 한다. 자리 하나 더 만들어 대기업, 건물주에게 화살을 돌리지 말고 최저임금부터 한국 수준에 맞췄으면 한다.

그래도 본질은 실력이다. 식당에 가면 상당수 주인이 주방이 아니라 계산대에 있다. 이른바 '뜨는 동네'엔 인테리어만 그럴듯한 패션 식당 이 넘쳐난다. 동네 공장은 독창성보다 싼 임금에 사활을 건다. 한국 자영업엔 장인은 적고 경영자만 많다. 싸잡아 비난하는 건 아니다.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예전 세대는 일본에 가면 소니 전자제품을 샀다. 요즘 세대가 일본에 가서 사고 먹고 감동하는 것은 일본 자영업이 만들어낸 작은 '천하제일'들이다. 환경이 아무리 열악해도 본질을 외면해선 안 된다.

 



출처 : 조선일보 선우정 사회부장 /2018/0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