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이런 일이

완장들이 뒤집은 폭력시위의 진실

부산갈매기88 2018. 9. 20. 07:47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 위반보다 훨씬 처벌이 무거운 죄목인 ‘소요(騷擾)죄’는 유신시대와 계엄령 때 외에는 딱 두 번 등장했다. 1986년 5·3인천사태와 2015년 11월 14일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열린 민중총궐기 시위 때다. 필자는 두 현장을 모두 봤다.

5·3사태 때의 기억이다. 옛 인천시민회관 앞 사거리에 앉아 구호를 외치던 수만 명의 시위대속으로 갑자기 경찰 페퍼포그 장갑차(개스차)가 곤봉을 휘두르는 백골단(사복경찰)들의 호위를 받으며 깊숙이 치고 들어왔다.  

그런데 페퍼포그 차의 시동이 꺼져 군중 속에 갇혀 버렸다. 백골단은 이미 물러난 상태였다. 시위대가 각목 등으로 차문을 떼어냈다. “화염병 가져와!” 곧 화염병을 던져 넣을 기세였다. 그때 다시 시동이 걸린 페퍼포그 차는 간신히 도주했다.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만약 화염병을 넣었으면 폭발로 대규모 인명 피해가 났을 것이다. 군중집회에선 순식간에 예기치 않은 유혈사태가 벌어질 수 있음을 절감한 순간이었다.

그런 걱정이 다시 든 것은 거의 30년 후인 2015년 11월 14일 토요일 오후의 민중총궐기 현장이었다. 당시 채널A에 파견 중이던 필자는 당직 근무였다. 채널A는 미리 동아일보 광화문 사옥과 동아미디어센터 옥상에 여러 대의 카메라를 설치해 집회 현장을 처음부터 밤까지 생중계했다. 

별다른 충돌 없이 진행되던 집회에서 오후 3시를 넘어서면서 불길한 조짐이 일었다. 차벽으로 세워놓은 경찰버스들에 일부 시위대가 밧줄을 걸고 당기기 시작했다. 일부는 버스 지붕에 올라갔다. 경찰버스들이 맥없이 끌려 나가자 이를 막으려 앞으로 나선 의경들을 향해 시위대는 파이프와 쇠사다리를 마구 휘둘렀다. 경찰 살수차가 물을 뿜기 시작한 것은 한참 뒤였다. 그 후 벌어진 폭력사태는 도심 시위 사상 가장 과격한 폭력 중 하나로 기록됐다. 경찰 차량 52대가 부서지고 경찰 192명 등 수백 명이 다쳤다. 농민 백남기 씨가 경찰의 직사살수에 쓰러져 숨지는 비극도 벌어졌다. 경찰은 5·3사태 후 처음으로 소요죄를 적용했으나 검찰 기소단계에서 소요죄는 빠졌다.

대개 폭력사태가 벌어지면 누가 먼저 폭력을 휘둘렀는지를 놓고 평행선 논쟁이 벌어진다. 그러나 아예 처음부터 제3자가 현장을 봤다면 누구 책임인지가 명확히 드러나게 된다. 이날 채널A의 생중계는 폭력 유발자 논쟁을 불필요하게 만들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많은 시청자가 지켜봤기 때문이다. 대법원도 지난해 5월 31일 폭력시위 책임을 물어 민노총 한상균 위원장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다. 5·3사태 때는 전두환 정권이 집회 자체를 불허한 채 페퍼포그 차를 돌진시키고 시위대를 마구 구타하는 등 폭력을 행사했지만, 민중총궐기는 분명히 시위대가 먼저 폭력을 휘둘렀다.

그런데 불과 3년도 안 돼 그날의 진실이 뒤집어 졌다. 경찰청 인권침해사건 진상조사위원회는 최근 “과도한 경찰권 행사였다”고 결론짓고, 경찰에 손해배상청구소송 취하를 권고했다. 수많은 국민이 당시 상황을 지켜봤는데 경찰 스스로 정반대 결론을 내린 것이다.  

 

동아일보 이기홍 논솔위원  2018. 9.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