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우리 할아버지는 사탕수수와 함께 고구마를 기르셨다. 사탕수수는 팔고 고구마는 집에서 먹기 위해 길렀다. 당시에는 모종이라는 것도 없었고 고구마에서 순이 나오는 대로 흙을 펼쳐 덮고 물을 흠뻑 주면 끝이었다. 텃밭의 다른 채소들과 달리 잡초를 제거하거나 물을 주는 일도 없이 방치되었지만 오키나와의 뜨거운 햇볕 아래 잘 컸다. 텃밭 근처에 염소와 닭, 돼지를 함께 키우고 있었는데 염소나 닭은 신경 쓸 일이 없었지만 돼지는 우리 속에서 200kg의 몸을 꼼짝하지 않고 먹어 대는 놈이었다.
어쩌다 한 번씩 10마리 정도 새끼를 낳으면 내다 팔았다. 할머니는 식구들이 먹고 남은 음식에 고구마 줄기를 잘라 넣고 죽처럼 끓여 정성스럽게 준비했다. 나는 옆에서 불이 꺼지지 않도록 관리하는 일을 도맡아 했다. 일이 거의 끝나갈 때쯤이면 꺼져가는 불 속에 고구마 몇 알을 넣어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운 최고의 군고구마가 보상으로 주어졌다. 할머니는 흰색과 보라색 고구마 2가지를 키우셨는데 보라색이 예쁘기는 하지만 맛은 흰 것이 더 달다.
오늘날 오키나와 보라색 고구마는 파이나 케이크, 아이스크림과 쿠키 등 특산물로 넘쳐난다. 고구마로 만든 첫 디저트는 미국으로 끌려간 흑인 노예로부터 시작되었다. 요리를 하고 꺼져 가는 장작이 재가 될 때쯤 고구마를 통째로 넣어 익혔다. 껍질을 벗기면 고구마의 당성분이 마치 전체를 설탕으로 코팅한 듯한 느낌이었다. ‘캔디드-맛탕’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생겨났다.
당시 흑인들에겐 부엌조차도 허락되지 않았던 시기였기에 흑인들이 자기 집에서 직접 고구마파이를 만들어 먹기까지는 1863년 1월 1일 링컨 대통령이 350만 명 노예해방을 선언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추수감사절에 흔히 만드는 호박파이가 백인 거주 지역인 뉴잉글랜드의 미국 북부를 대표하는 파이라면 고구마파이는 흑인들에 의한 남부의 미국 음식을 대표하는 파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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