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

폴란드 벽돌공의 슬픈 표창장

부산갈매기88 2020. 3. 19. 08:23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폴란드 어느 마을에 성실하고 일솜씨 좋기로 소문난 벽돌공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마을 밖 벌판에 커다란 건물을 짓는다는 공고가 붙었고 벽돌공은 다음 날부터 건축 현장에서 일하게 됐다. 오랜만에 얻은 일자리인지라 벽돌공을 기쁜 마음으로 매일 아침 제일 먼저 일을 시작했는데, 시간이 흘러 건물들이 조금씩 모양새를 갖추게 되면서 사람들은 이런저런 이상한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관리자가 안 보이면 삼삼오오 게으름을 피우곤 했다. 하지만 벽돌공은 열심히 일했고 그로 인해 벽돌공이 맡은 구역은 다른 곳보다 공사가 빠르게 마무리되곤 했다.


몇 달 동안의 공사가 끝나고 건물이 완성되던 날, 벽돌공은 그동안의 성실함에 대한 공로로 표창장을 받았다. 더 이상 일거리가 없어졌다는 아쉬움도 컸지만 표창장을 들고 집으로 향하는 벽돌공의 발걸음은 가벼웠고 나름 뿌듯함이 가슴에 가득 찼다. 정문을 나서면서 돌아본 건물들을 크고 웅장했으며 정문 또한 반듯하게 세워져 있었는데, 정문 위 푯말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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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수용소. 사진=조선DB

자신이 짓는 건물이 수용소라는 걸 알았다면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때로는 자신의 의도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일 자신이 짓고 있는 건물이 수용소가 되고, 그 곳에서 수백 만 명이 학살당할 사실을 알았다면 벽돌공은 어떻게 했을까? 필경 그곳에서 일을 안 했거나 건물이 늦게 완성되도록 게으름을 피우고, 심지어 관리자 눈을 피해 건물을 일부러 부실하게 만들었을 것 같다.


필자가 입학처장 업무를 수행하면서 고민하고 자주 자문했던 것이 필자가 혹시 폴란드 벽돌공의 모습은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입학처장이 되어 처음 입시자료들을 분석하면서 카이스트 합격생의 상당수가 서울대와 의과대학에 동시 합격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는데, 자연스레 학생들을 다른 대학들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입시전략을 고민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번뜩 필자 스스로 그동안 손가락질 해왔던 그런 입시정책자가 되고 있다는 사실에 정신이 들었다.

카이스트 입학처장은 어떤 비전을 가지고 어떤 일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학생들을 성적순으로 한 줄로 세우고 다른 대학들과 제로섬 게임을 하는 방식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더구나 카이스트 입시는 영재학교와 과학고의 교육 방향을 이끄는 중요한 축으로 자칫 잘못된 방향의 카이스트 입시는 우리나라 이공계 영재들의 중고등학교 교육을 망가뜨릴 수도 있다는 사실이 필자를 더욱 긴장케 했다.


필자가 생각하는 입시 철학은 입시는 교육의 일부분으로 교육 결과를 가름하는 것과 함께 교육의 방향을 선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필자가 생각하는 나쁜 입시 가운데 하나는 어려운 문제를 내는 것이다. 차별화된 점수로 변별력이 좋아지고 입시 문제의 난이도가 마치 그 학교 입학 난이도로 이해되는 현실도 존재하지만, 그로 인해 학생들은 불필요하게 어려운 문제를 빨리 푸는 연습만을 하게 되어, 개념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깊이 생각하거나 그 개념을 이용해 새로운 것에 적용하는 교육은 이루어질 수 없게 된다. 더구나 사교육이 심각한 현실에서 학생들을 더욱 더 사교육으로 몰아가는 부작용도 생기게 된다.


다른 하나는 ‘잘하는 학생’보다 ‘잘할 학생’을 선발하자는 방침이다. 중고등학생 시절 열심히 공부하다가 대학에 올라와서 지쳐 떨어지는 학생보다는 대학에 올라와 자신이 원하는 전공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고 그런 자질이 있는 학생들을 선발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적이 꾸준히 올라가는 학생, 자기 꿈이 명확하고 대학에서 그 꿈을 실현하고자 최선을 다 하는 학생을 우선시 하고자 했다. 그런 와중에 영재학교들의 “왜 우리 학교 학생들을 더 많이 뽑아주지 않느냐?”는 볼멘소리를 들었고, 필자는 “중학교 때 어려운 수학문제를 잘 풀어 영재학교에 들어간 학생이 대학에 와서도 열심히 공부하고 사회에 나가 독창적인 연구를 해서 훌륭한 과학기술 인재가 될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조심스럽다”라고 답변한 적도 있다.

 

‘노하우(know-how)'에서 '노웨어(know-where)' 세상으로

과거에는 어려운 문제를 풀 수 있는 것만으로 훌륭한 실력을 인정받았고, 사회에서 가장 중요시 되었던 단어 가운데 하나가 ‘노하우(know-how)’였던 시절도 있었다. 그 시절에는 ‘아는 것이 힘’이었는데, 자연스레 교육도 학생들에게 보다 많은 것을 가르쳐 외우게 하고, 빨리 많은 문제를 풀게 하는 교육이 중요했으며, 입시도 그런 방향으로 설계되었으리란 생각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노하우’라는 말을 자주 하지 않는다. 물론 숨겨진 노하우가 지금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즈음 스마트폰으로 검색을 하면 실시간으로 세상에 있는 너무 많은 정보들을 쉽게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현대사회를 ‘노웨어(know-where)’의 세상, 즉 수많은 지식과 정보가 어디에 있는지 검색 엔진을 통해서 빨리 찾아내는 것이 실력인 시대라 일컬으며 때로는 정보 양이 너무 많아 ‘빅데이터(big data)’의 세상이 되었다고도 하고 그 많은 데이터를 더욱 효과적으로 이용하고자 인공지능(AI)을 도입하기도 한다. 필자가 생각하는 오늘날 그리고 미래의 세상에서는 그 많은 데이터와 노하우들을 어떻게 새롭게 해석하고 새로운 곳에 적용할 수 있는지가 경쟁력의 핵심이 아닐까 한다. 즉, 주어진 문제를 잘 푸는 사람 (problem solver)보다 새로운 문제를 잘 만들어내는 사람(problem maker 혹은 problem creator)을 향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미 시작된 새로운 세상 속에서 우리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그리고 그렇게 가르치도록 선발기준과 입시는 어떻게 변해야 할까? 많이 알고 빨리 푸는 세상은 오래 전에 분명히 지나갔다. 과거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였던 우리나라의 상황 속에서 우리의 과거 교육은 나름대로 성공했었던 것 같다. 달리기 경주에서 100등 하고 있는 선수에게 필요한 전략은 아무 생각 없이 앞 사람만 보고 무조건 열심히 달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 수십 년 그렇게 달려오다 보니, 어느 순간 20등 안에도 들고, 심지어 10등을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 된 것 같다. 10등을 한 어느 날 기쁨의 환호성을 외치게 되지만 그것도 잠시, 처음 서 본 맨 앞줄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어쩔 줄 모르고 있는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발견한다.

과거 시절 열심히 노력했던 우리 사회와 교육당국이 오늘날 4차 산업혁명시대에서 폴란드의 벽돌공과 같이 의도치 않게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아이들에게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씹어 본다. 

 

이승섭 카이스트 교수 / 조선일보 2020/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