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식히기

한잔의 차, 노르망디 상륙 英 탱크부대 몰살 위기로 몰다

부산갈매기88 2020. 5. 19. 07:52

茶, 17세기 초 영국에 전파… 영국과 영국인 삶의 한복판에
울고 있는 영국인에게 茶 건네면 마음 파란하늘로 변할 것
韓 찻집 주인, 마음 훈훈하게 하는 이야기 풀어내는 재담꾼
이제 커피가 茶의 세계 파괴… 커피숍 없는 세상을 꿈꾼다      

        

나에게 은밀한 비밀이 하나 있다. 무모한 상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커피숍이 없는 세상을 꿈꾼다. 그 이유를 이야기해 보겠다.

체인 커피숍은 개성과 감성이 느껴지지 않는 단조로운 미국식 패스트푸드점과 많이 닮았다. 미국식 문물을 무조건 비난하는 것은 잘못이지만, 커피숍은 차의 세계를 파괴하는 주범이다. 차는 영국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차가 영국에 처음으로 전해진 건 1600년대 초였다. 처음엔 부유층만이 누리는 비밀스러운 기쁨이었다. 은밀한 호사는 곧 일반 대중의 관심을 얻게 되었다.

1717년 토머스 트와이닝은 영국에 여성들을 위한 티숍을 처음 오픈했다. 영국 여성들이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공공장소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차가 가진 힘은 진화했다. 산업혁명 기간에는 차를 마시면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일반 노동자의 권리가 되었다. 영국 법령에는 아직도 모든 노동자는 6시간마다 20분간 차를 마시며 휴식을 취할 권리가 있다는 내용이 명시돼 있다.

영국에서 차의 황금기는 차에 대한 지극한 사랑 때문에 전쟁에서 참패할 위기까지 내몰렸던 2차 대전 때였다. 1944년 6월 노르망디상륙작전을 지휘하던 영국 장군들은 엄청난 실수를 하게 된다. 그들은 차를 만드는 도구 대신 군인들이 마시기 거부했던 인스턴트 티 믹스를 지급하여 탱크 부대를 프랑스로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이와 함께 내려진 별도의 지침은 야간 활동을 하는 병사들은 차와 휴대용 스토브를 요청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프랑스에 도착하자마자 거의 모든 연대는 야간 활동이 필요하다는 무전을 본부로 보냈다. 이에 물자 보급로는 차와 관련된 물품으로 꽉 막히게 되었다.

마침내 차를 만들 수 있는 용품이 지급되었고, 탱크병들은 크게 환호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담했다. 한 독일 탱크 부대 지휘관은 1944년 영국군들의 노르망디 티 파티를 어떻게 끝나게 만들었는지 기록했다. 그는 영국군들이 탱크를 세우고 밖에 나와 홀짝이며 티를 마시는 장면을 목격했고, 신이 나서 영국군 탱크들을 박살 냈다고 한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일러스트=이철원

그러나 혁명이 운명을 바꾸기도 한다. 1944년 가열 장치의 일종인 보일링 베슬(Boiling Vessel)이 발명됐다. 이제 탱크가 움직이는 동안에도 탱크 내부에서 차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영국 장군들은 즉시 모든 무장된 군사용 차량에 반드시 보일링 베슬을 장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은 지금도 유효하다. 이로써 오늘날까지도 탱크에 탑승한 영국 군인들은 다리를 폭파하거나 포탄을 사격하는 중에도 뜨거운 차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민간인들의 세계에서 차는 더욱 정서적 역할을 담당한다. 상심에 잠긴 영국인에게 차를 함께하자고 제안하는 것은 "나에게 이야기해. 내가 항상 옆에 있잖아"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울고 있는 영국인에게 차 한 잔을 건넨다면 그들의 마음은 잿빛 구름이 가득한 하늘에서 밝고 파란 하늘로 변할 것이다.

진짜 영국을 볼 수 있는 장소는 펍(pub)과 펍의 고상한 사촌쯤 되는 티숍이다. 많은 펍에서 볼 수 있듯이 영국 사람은 대개 취하면 소란스럽고 공격적으로 변한다. 그러나 차와 함께라면 부드럽고 예의 바르며 느긋하게 서로의 빈 잔을 채워주며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할 준비가 된다.

영국의 티숍은 2005년 내가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해 전통 찻집을 찾았던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그 당시만 해도 찻집은 찾기 쉬웠다. 작은 오두막 같은 구조에 다듬지 않은 두꺼운 나무 테이블들…. 전통차만을 판매하는 한국의 찻집은 무척 인상 깊었다. 선명한 붉은빛을 띠는 차, 타르처럼 걸쭉한 혼합물로 보이는 한약 냄새가 나는 차, 지나치게 달긴 하지만 입에 착 달라붙는 뽀얀 우유 빛깔의 차…. 찻집 주인장은 마음을 훈훈하게 해주는 이야기들로 기나긴 열변을 토했다.

그 당시 나는 그 찻집에 앉아 한국 문화의 일부가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2020년 이제 전통 찻집은 찾기 어렵다. 차의 본고장 영국에서도 커피 소비가 고공 행진을
하고 있다. 1970년 중반 영국인은 일주일에 25잔 정도의 차를 마셨다. 그 숫자는 '8'로 줄었다. 미국식 체인 커피숍은 이제 영국과 한국의 모든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심지어 가장 고풍스럽고 역사적인 마을에까지 등장했다. 반면 찻집은 멸종 위기에 놓여 있다. 이제 커피를 버려라. 커피는 소중한 우리 문화에 독약이다. 그리고 유일한 해독제는 '차'다.



출처 : 조선일보/2020/05/20  팀 알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