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잠녀(해녀) 옷 짧아, 알몸으로 만경의 물결 속에 자맥질하네. 요즘 일은 힘들고 어물 잡기 어려운데, 예사로 채찍질하는 관아는 몇 곳인가?’라는 시에서 조정철(趙貞喆)은 제주 유배 때 본 해녀의 처참한 모습을 담았다. ‘위태롭구나, 전복 따는 여인이여. 바다에 나가 맨몸으로 들어가네. 저 괴로운 생애 가련하여서, 어진 사람은 차마 목구멍으로 넘기지 못하네.’ 제주목사였던 이예연(李禮延)은 전복 따는 해녀의 안타까운 모습에 차마 전복을 먹을 수 없음을 시로 표현했다. 두 시에서 해녀가 알몸으로 물질했다고 한 것은 상의를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1702년)에 물소중이만 입고 물질하는 해녀 모습이 그려져 있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우리 부모 날 낳을 적에, 해도 달도 없을 적에, 나를 낳아 놓았을까. 어떤 사람 팔자 좋아서, 고대광실 높은 집에서, 긴 담뱃대 물고 앉아, 사랑방에 잠을 잘까. 해녀팔자는 무슨 팔자라, 혼백상자 등에 지고서 푸른 물속을 오락가락.’ 해녀들은 고단한 삶을 민요에 담았다. 얼마나 고단한 삶이면 혼백상자를 지고 물속으로 들어간다고 했을까. 필자는 해녀를 조사하면서 그녀들을 가장 힘들게 한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해녀 할머니들의 한결같은 답변은 추위였다. 1970년대 초반까지 방한 기능이 전혀 없는 무명으로 만든 물소중이(하의)와 물적삼(상의)을 입었다. 쌀쌀한 날 물질하고 나오면 사시나무 떨 듯 했다고 한다. 고무 잠수복으로 바뀌면서 오래 물질할 수 있게 되어 더 많은 해산물을 채취했다. 부력으로 힘을 적게 들이고 떠 있을 수 있었고, 납 벨트를 착용해 더 깊이 잠수할 수 있게 되었다.
해녀에게 고무 잠수복의 보급은 혁명이었다. 1960년대 일본으로 물질 갔던 해녀들이 가지고 오면서 알려졌고, 한국도 만들기 시작했다. 필자는 처음 잠수복을 만든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수소문한 결과, 동해 해녀들은 해왕잠수복사와 울산잠수복사에서 주문 제작하고 있었다. 40여 년을 경쟁관계에 있는 두 잠수복사의 주인은 자매였다. 두 곳의 주인 모두 “최초의 잠수복 제작사는 부산의 보온상사”라는 증언을 했다. 필자는 우여곡절 끝에 보온상사를 찾았다. 하지만 설립자는 만날 수 없었고 아들이 운영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가업을 물려받은 그의 형도 세상을 떠났다. 최근까지 잠수복을 만들던 어머니도 2년 전 교통사고를 당하여 일을 할 수 없었다.
제주 해녀 출신인 그의 어머니는 1960년대 후반부터 일본에서 고무 원단을 수입하여 잠수복을 만들었다고 한다. 고성, 속초, 제주의 잠수복 제작자들에게 기술을 전수했다. 1980년대는 10명의 직원을 뒀고, 작업장도 두 곳을 운영할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지금은 찾는 사람이 드물다. 홀로 자리를 지키는 모습이 힘겨워 보였으나, 보온상사의 역사를 말할 때 눈은 반짝였다. 그는 한국해양대 해양공학과에 다니던 4학년 여름방학 때 아버지를 돕기 위해 발을 들여놨다가 홀로 지키게 됐다며 담배연기를 뿜었다. 우연과 필연이 교차한 그의 선택에는 자부심과 회한이 중첩되어 있었다. 고무 잠수복 역사를 찾아 나선 필자의 여정도 그렇게 빈 공간을 남겨두고 갈무리했다.
동아일보 202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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