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선엽 장군 별세]軍-정치권 등 각계 인사 조문
정경두 “투철한 군인정신 이을 것”… 육군 의장대 도열… 생전 모습 전시
영정 앞엔 태극훈장-美 은성훈장… 6·25때 최연소 육참총장 등 맡아
최대 격전 다부동 전투 승리 견인… 휴전회담땐 한국군 대표로 활약
1 백선엽 장군이 2012년 12월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동아일보와의 인터뷰 도중 6·25전쟁 당시 맥아더 유엔군 최고사령관과 대화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을 손으로 가리키고 있다. 동아일보DB
“큰 별이 졌다.”
11일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된 백선엽 장군의 빈소를 찾은 정경두 국방부 장관은 숙연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허리를 숙여 예를 올린 정 장관은 “고인은 대한민국의 발전과 군 건설에 초석을 놓은 영웅이셨다”면서 유족을 위로했다.
빈소에는 첫날(11일)부터 각계의 조문이 이어졌다. 당정청 주요 인사들이 대거 다녀갔다. 박지원 국가정보원장 후보자는 빈소를 찾아 “(고인은) 집안 형님과 함께 창군동지회 멤버였다”는 인연을 공개했고, 미 인도태평양사령관을 지낸 예비역 해군 대장인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는 하얀 국화꽃을 영전에 올리며 추모한 뒤 절도 있는 동작으로 ‘뒤로 돌아’ 자세를 취하며 군인의 예를 갖췄다. 12일엔 정세균 국무총리,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 주호영 미래통합당 원내대표 등이 조문 대열에 합류했다.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과 서훈 국가안보실장도 다녀갔다. 유력 대선 주자인 이낙연 민주당 의원도 빈소를 찾아 유족을 위로했다. 유족을 접견하고 나서는 이해찬 대표를 향해 보수 유튜버들이 “누가 친일파냐. (일본) 천황에게 고개 숙여 절한 김대중이 친일파다”, “어떻게 장군님을 이렇게 대우할 수 있느냐”고 고함을 치면서 빈소를 지키는 관계자들과 잠시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2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가 2018년 11월 21일 백 장군의 백수(白壽) 축하 생일 때 무릎을 꿇고 축하하는 모습. 동아일보DB
빈소 앞 복도에는 육군 의장대 10여 명이 부동자세로 예를 갖춘 가운데 고인이 6·25전쟁 당시 낙동강 전선을 지켜낸 다부동 전황을 신성모 국방부 장관에게 보고하는 장면 등 사진 10여 장과 동영상이 전시됐다. 고인의 영정 앞에 놓인 태극무공훈장, 미국 은성무공훈장 등은 생전의 위업을 증언하는 듯했다.
백 장군에겐 ‘살아 있는 6·25 전쟁 영웅’ ‘죽음보다 패전을 두려워한 용장’ 등 숱한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6·25전쟁 발발부터 정전협정 체결 때까지 1128일간 1사단장과 최연소 육군참모총장 등을 맡아 숱한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며 공산군과 격전을 치렀다.
3 1950년 10월 19일 육군 1사단장이던 백 장군(왼쪽)이 평양에 입성한 뒤 프랭크 밀번 미군 1군단장에게 정황을 설명하는 장면으로, 백 장군이 군 역사 기록물로 육군에 기증한 사진이다. 해리스 트위터
1사단장 시절 최대 격전인 ‘다부동 전투’에선 공포에 질려 퇴각하는 부하들을 가로막고 “나라가 망하기 직전이다. 미군이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이럴 수 없다”면서 “내가 앞장설 테니 날 따르라. 내가 물러서면 날 쏴라”라고 권총을 들고 독려해 승리를 일궜다. 이는 인천상륙작전 성공과 평양 진격의 발판을 만든 것으로 한미 양국군에 전설로 회자된다.
백 장군은 한국보다 미국에서 더 인정받는 전쟁 영웅이었다. 주한미군은 그를 ‘살아 있는 전설(living legend)’로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역대 주한미군 사령관들은 “한국전쟁의 영웅이신 백선엽 장군님”이라는 말로 이취임사를 시작하는 게 전통이 됐다. 그럼에도 고인은 생전에 ‘노병’으로 불러달라면서 “시대가 부여한 역할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1군단장 시절 휴전회담의 초대 한국군 대표 당시 에피소드도 회자된다. 당시 맞은편의 이상조 북한군 소장이 빨간 색연필로 “제국주의의 주구는 상갓집 개만도 못하다”고 쓴 것을 보여주며 자극했지만 일절 대응하지 않았다고 그는 회고하기도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일도 유명하다. 1949년 군 내 남로당 연루자를 가려내는 숙군 작업 당시 정보국장이던 고인은 남로당 연루 혐의로 조사를 받던 박정희 당시 소령의 구원 요청을 수용해 상부에 재심을 요청했고, 그 덕택에 박 소령은 불명예 제대로 처벌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고인은 1940년대 일본군(간도특설대) 복무 이력으로 친일파 논란에 시달리기도 했다.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와 광복회 등은 그가 자서전 등에서 언급한 간도특설대 활동 내용을 근거로 독립군을 토벌한 친일반민족행위자에 포함시켰다. 이에 대해 그는 언론 인터뷰 등에서 “독립군을 본 적이 없다. 친일 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동아일보 202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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