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이야기

권성준 한양대 교수 위암 명의, 양양보건소로 가는 까닭은…

부산갈매기88 2020. 8. 13. 07:42

이달말 정년 권성준 한양대 교수
대형병원들 러브콜 뿌리치고 “의사 모자란 곳서 의료봉사 여생”
환자위해 평생 7시 회진 원칙 지켜
마지막 수업서 “권위의식 버려야”

이달 말 정년퇴임을 앞둔 권성준 한양대 의대 교수가 12일 의대 건물 앞에서 활짝 웃고 있다. 국내 위암 수술의 권위자 중 한 명인 그는 내년 1월 강원 양양군의 보건소장으로 ‘인생 2막’을 시작한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지난달 30일 환한 미소의 노교수가 서울 성동구 한양대 의대 강단에 섰다. 그저 ‘좋은 의사가 되겠다’는 꿈으로 이 학교에 입학한 지 47년 만이다.

이날 강의는 8월 말 정년퇴임을 앞둔 권성준 한양대 의대 교수(65)의 마지막 수업이었다. ‘되도록 짧게 마무리하고 내려오겠다’고 마음먹었지만, 막상 제자들의 얼굴을 보니 하고 싶은 말이 많아졌다. 외과 의사로 지낸 긴 세월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에 흘러갔다.

‘위암 수술 건수 3000건 이상’, ‘대한위암학회장’, ‘모교의 대학병원장’….


이 정도면 누가 봐도 의사로서 그리고 학자로서도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학생들은 그의 퇴임 후 거취를 궁금해했다. 사실 그의 행보는 학교와 의료계에서도 주시하던 부분이다. 한 분야에서 ‘명의’로 우뚝 선 이에게는 은퇴 후 좋은 기회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고액 연봉을 받고 대형병원에 스카우트될까? 의료 관련 공공기관 요직에 발탁될까?

실제로 퇴임을 앞둔 권 교수에게는 ‘러브콜’이 쇄도했다. 여러 대형병원에서 그를 스카우트하려 나섰다. 특히 지방의 한 대학병원은 누구나 탐낼 조건을 제시했다. 사실 권 교수에게도 ‘건강이 다할 때까지 수술을 하고 싶다’는 외과 의사로서의 바람이 있었다. 요즘도 20kg짜리 배낭을 메고 2박 3일 등산을 할 만큼 체력에도 자신이 있다.

 

그런데 권 교수의 입에서 예상 밖의 답변이 나왔다.

“저는 양양군의 보건소장으로 갑니다.”

그가 택한 건 시골의 4급 공무원, 바로 강원도 ‘양양군 보건소장’ 자리였다. 양양군은 설악산에 인접한 작은 지방자치단체다. 최근 몇 년간 서핑을 즐기는 젊은이들이 많이 찾으면서 양양이 ‘핫플레이스’로 뜨고 있지만, 여전히 도시에 비해 인프라는 열악하다. 전체 인구 약 2만8000명의 평균 연령이 50세에 이를 만큼 고령화 지역이기도 하다. 이들을 돌보는 의사는 공중보건의 12∼14명을 합쳐도 20명 남짓. 권 교수는 “우리나라 평균(1000명당 의사 2, 3명)에 비춰보면 양양군에는 최소 62명의 의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열악한 생활환경과 상대적으로 적은 보수에 웬만한 의사들은 지방 근무를 피한다. 공중보건의가 아니면 의사 구경이 쉽지 않다. 더욱이 권 교수는 서울에서 태어나 평생 서울에서 살아온 뼛속들이 ‘서울 사람’이다.

그런데 굳이 왜 지금, 하필 왜 양양으로 떠나려는 걸까?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아직 1, 2년은 왕성하게 수술할 자신 있어요. 하지만 더 나이가 들어 다른 매력적인 선택지가 없을 때 지방 보건소로 가는 건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건강에 자신이 있는 지금 진정 원하는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은퇴 시점이 다가오기 시작한 5년 전. 누구보다 자신 있던 기억력이 어느 순간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감지한 그때, 삶의 기록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손을 잡고 달리기를 하다 꼴찌를 했던 기억, 중학교 시절 친구들…. 쓰다 보니 어느덧 ‘내가 하고 싶었던, 지금도 하고 싶은 일은 뭘까’라는 질문에 부딪혔다.

오랜 고민 끝에 내린 답은 ‘봉사’였다. 누군가를 돕는 것만큼 의미 있는 일이 없을 거 같았다. 특히 등산 마니아인 그로선 설악산이 인접한 양양에서 자신이 늘 잘해 왔던 의료로 봉사하는 삶을 산다면 그게 바로 행복 아니겠는가.

제2의 삶의 무대로 양양을 택한 사연은 2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양양에 살던 지인이 동네 사람이 아플 때마다 “누가 어디가 아프다는데… 의사를 찾기 어려워서…”라고 연락을 해왔다. 그럼 권 교수는 한양대병원의 명의들을 소개하고, 직접 환자 병실에 찾아가 손을 잡고 위로를 건넸다. 양양 어르신들 사이에선 “아프면 일단 권 교수를 찾아가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그를 찾아오던 사람들을 향해 내년 1월이면 권 교수가 양양으로 간다. 건강 정보가 부족하고 병원을 찾기도 어려운 지역 주민들을 적극적으로 찾아다닐 계획이다. 요즘 의료계는 ‘의사 수급’ 논쟁이 한창이다. 특히 지역별 의료 불균형이 화두다. 권 교수의 양양행이 큰 울림을 주는 이유다.

 

“좋은 의사가 되고 싶다면 권위 의식을 버리고 근면, 봉사, 희생정신으로 무장하라.”

그가 마지막 수업에서 제자들에게 남긴 말이다. 암 수술 전날부터 코줄을 달고 힘겨워하는 환자들을 위해 평생 ‘매일 오전 6시 반 출근, 7시 회진’ 원칙을 지키며 단 1분이라도 빨리 불편을 덜어주고자 노력했던 그가 ‘미래의 의사’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메시지다.

 

동아일보 202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