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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도 60년간 몰랐다… 군번없는 소녀 첩보원들, 6·25 戰功 첫 인정

부산갈매기88 2022. 7. 29. 07:29

“첩보 활동을 하다 적 총구가 허리춤에 콱 박히던 그 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이 끼칩니다. 그래도 나라 위해 몸 바친 그때를 후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지요.”

 

인천 강화군 송해면에 사는 민옥순(88)씨는 지금도 1951년 11월 북한군에게 붙잡혔던 그 순간을 떠올리면 “가슴이 벌렁거린다”고 했다. 민씨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6월 대북 첩보·유격 부대였던 ‘8240부대’에 입대, 3년간 여성 첩보원으로 활약했다. 민씨는 야간에 민간인 복장으로 북한 개풍군 일대를 침투했고, 인민군 부대의 규모와 위치, 이동 동향 등 수집한 정보를 치마에 그렸다. ‘군번 없는 군인’이었던 그는 포로 위험을 무릅쓰고 그렇게 3년간 남북을 건너다녔다.

 

1951년 ‘열일곱 소녀’였던 민씨는 71년이 흐른 28일, 국방부에서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6·25 비정규군 공로자’로 인정받았다. 민씨는 이날 본지 인터뷰에서 “공로자로 인정받았다는 이야기를 전달받고는 눈물밖에 나지 않았다”며 “죽어야 잊어버릴 가슴 아픈 기억이 많지만 지금이라도 나라에서 인정받을 수 있어 감사할 따름”이라고 했다.

 

국방부 비정규군 공로자 보상심의위원회는 이날 민씨를 포함해 6·25전쟁 기간 적군 지역에서 비정규군으로 활동한 여성 대원 16명을 공로자로 인정해 공로금 지급을 결정했다. 여성 비정규군이 6·25전쟁 공로자로 인정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전쟁 당시 8240부대나 켈로(KLO·비정규 대북 첩보 부대) 등 비정규군 부대에 속한 여성들은 첩보와 유격 활동 등 남성들도 하기 어려웠던 비정규전을 수행했다. 이날 공로자로 인정받은 16명 가운데 생존자는 13명이다. 대부분 85세가 넘은 고령이다.

8240부대원 단체사진… 여성이 20% - 1951년 6·25전쟁 당시 창설돼 서해 도서 지역 등에서 게릴라전을 펼쳤던 8240부대의 단체 사진(위)에 남녀 대원들의 모습이 보인다. 아래 사진은 대북 첩보 부대인 켈로부대에서 여성 첩보원으로 활동한 심용해(빨간색 원)씨의 가족사진. /국방부
 

황해도 연백 출신인 민씨는 1951년 6월 8240부대 타이거 여단에 입대했다. 51년 1·4 후퇴 당시 어머니와 동생 넷을 고향에 남겨두고, 아버지 오빠와 함께 강화도 교동으로 피란 온 지 5개월 만이었다.

 

8240부대는 6·25전쟁 당시인 1951년 1월 창설돼 서해 도서 지역과 황해도 내륙, 동해 등지에서 게릴라전을 펼쳤던 유격 부대다. 1948년 만들어진 대북 첩보 부대인 켈로부대도 1951년 11월 이 부대로 흡수됐다. 부대 인원이 최다 3만명에 이르기도 했는데, 부대원 중 20%는 민씨와 같은 여성이었다고 한다. 민씨는 “당시 8240부대 부사관으로 있던 친구 오빠가 ‘네가 적진에 들어가서 정보 수집을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며 “겁이 났지만 다시 고향에 가서 어머니와 동생을 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하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민씨는 입대 이후 1개월간 첩보 수집 교육을 받은 뒤 본격 첩보원 생활을 했다. 야간에 침투해 북한군 부대 위치와 규모, 이동 동향 등을 탐지했다. 1951년 동료와 중공군 포 진지 첩보 수집을 위해 침투했다가 북한군 검문에 걸리기도 했다. 그러나 북한군은 여성이라 위협적이라고 판단하지 않았는지 끌고 가지 않았다고 한다.

 

민씨는 “어느 날 아버지가 고향의 어머니와 동생을 데려오겠다고 하시길래 첩보 생활을 하며 얻은 정보를 갖고 ‘중공군이 곧 들이닥칠 것 같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말씀드렸다”며 “그런데도 아버지는 결국 북으로 가셨고 얼마 못 가서 중공군이 남하하기 시작했다. 그때 교동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 고향을 보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고 했다.

심용해(84)씨도 열세살 중학생이던 1951년 켈로 부대에 입대했다. 경기 용인이 고향인 심씨는 당시 독립운동을 한 아버지와 고모부 등의 영향을 받아 여군 모집에 자원했다고 한다. 의협심이 투철했던 심씨는 동네 또래 여성들에게 “같이 여군에 자원하자”고 권유했다고 한다. 심씨는 의정부와 강원 철원 등에 주둔하면서 북한 평강 지역 등으로 침투해 첩보원 생활을 했다. 1952년 9월 월정리에서 중공군 2명에게 체포됐지만 구사일생으로 탈출했고, 이듬해 적 진지 후방을 정찰하다 부상했지만 약 25회 첩보 임무를 계속 수행했다고 한다.

 

심씨의 맏딸 김은희(66)씨는 “어머니는 여성 첩보원으로서 목숨 걸고 나라를 위해 일했다는 것에 항상 자부심을 느끼셨다”고 했다. 심씨는 자신의 첩보원 생활을 10여 년 전까지도 자녀들에게 알리지 않을 정도로 첩보 업무 보안을 소중히 여겼다고 한다. 김씨는 “어머니가 요양 병원에 입원 중이시만 ‘지금 전쟁이 일어나도 그렇게 하시겠느냐’고 물으면 ‘똑같은 상황이 와도 그렇게 한다’고 말씀하곤 하셨다”며 “자식들에게는 ‘나라가 없으면 우리도 모두 없는 것’이라는 말씀을 늘 해주셨다”고 했다.

 

이명숙(90)씨는 1951년 1월부터 53년 7월까지 8240부대의 유격 부대 간호사로 복무했다. 치열한 전투로 부상한 대원들을 치료하는 임무를 맡았다고 한다. 특히 이씨는 1952년 5월 부대 전체가 적 지역에서 벌인 대규모 기습 유격 작전에 참가해 치료 활동을 계속했다고 한다.

 

국방부 비정규군 공로자 보상심의위원회는 현재까지 6차에 걸친 심의를 통해 총 740명을 비정규군 공로자로 인정했고, 본인과 유족에게 공로금 총 70억원 지급을 결정했다. 임천영 위원장은 “6·25 비정규군 공로자 대부분이 85세 이상 고령자임을 고려해 신속한 보상으로 공로자의 명예와 자긍심을 드높이는 계기가 되도록 하겠다”고 했다.

 

조선일보 2022. 7.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