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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 케첩의 유래

부산갈매기88 2009. 1. 8. 18:32

하인즈(Henry Heinz: 1844-1916)는 식품가공업의 케첩이나 피클의 대명사인 ‘하인즈’ 브랜드를 만든 사람이다.

 

19세기 중반 대부분의 농가가 먹고 남은 싱싱한 야채만 골라 사장에 팔았다. 포장도 없던 당시에 헨리 하인즈는 야채를 투명한 병에 고추냉이를 담아서 내놓아 불티나게 팔았다. 그는 품질을 보여주고 싶어서 고유상표까지 붙였다. 하인즈의 이때 나이가 아홉 살이었다.

 

1844년 10월11일, 피츠버그에서 독일계 이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밭일을 놀이 삼아 자랐다. 여덟 살 때부터 텃밭의 채소를 팔기 시작한 지 일년 뒤 그의 사업은 급격히 커졌다. 주상품인 고추냉이를 유리병에 담고 상표까지 부착하는 차별적 영업이 먹힌 덕분이다. 조그만 놀이터였던 그의 밭은 열두 살이 됐을 때 1만4,000㎡(약 4,230평)로 늘어났다. 하인즈의 농산물은 대형 도매상들의 마차에 실려 피츠버그 시내에 깔렸다. 신학교에서 상업학교로 옮길 무렵인 열일곱 살 때 연간 순소득이 2,400달러. 미국인 일인당 명목소득이 142달러에 머물던 시절이다.

 

그는 마케팅에 관한 한 천부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지역의 일류 호텔 식당의 테이블에 하인즈 브랜드가 새겨진 가공식품 병이 놓일 수 있도록 마케팅에 열을 올렸다. 그리고 조리시간을 줄여야 하는 바쁜 도시 주부들을 집중 공략했다.

 

소년의 천부적인 상재(商材)가 꽃 핀 것은 30대 이후. 부친의 벽돌사업을 돕다 스물다섯에 식료품 사업을 시작, 번창했으나 1875년 공황(1873년)의 여파로 부도를 맞은 뒤 연구개발에 매달려 출시한 신제품 ‘토마토 케첩’이 대박을 터뜨렸다.

 

원조인 중국에서 영국에 전해지기까지 온갖 양념장류의 통칭이었던 ‘케첩’이 토마토 케첩으로 고유명사화한 것도 이때부터다. 영업에서도 앞서나갔다. 공장 견학과 전광판 설치도 하인즈가 최초다. 전문 세일즈망 구축과 종업원복지제도의 선구자로도 꼽힌다.

 

그는 자사가 생산한 식품의 첨가 보존제에 독성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 유독성분은 아니었지만 장기간 복용하면 인체에 해를 미칠 수 있었기에 동종업계의 많은 비난과 반발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회사의 존립에도 상당히 영향을 미칠 것이리라 생각하면서도 과감하게 앞으로는 그 첨가제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 발표한다.

 

그로 말미암아 식품업계의 공방은 4년이나 계속되어 파산 직전까지 내몰렸지만, 하인즈라는 이름이 소비자들에게 강하게 각인되어 신뢰를 얻어 매출이 두 배나 뛰게 된다.

 

사망(1919년ㆍ75세) 후에도 그의 회사는 계속 성장, 오늘날 ‘하인즈 식품’으로 남아 있다. 하인즈가 문을 연 식품산업의 세계시장 규모는 약 3조 달러. 거대한 시장이 여기에서 시작됐다. 그는 야망이 있었고 늘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우리 시장은 세계다.”

 

오늘날 하인즈 케첩은 미국 내 70% 이상, 세계 케첩 시장의 50% 이상을 차지할 만큼 명성이 높다. 프랜차이즈 레스토랑 'T.G.I.프라이데이‘와 미국에서 가장 큰 ’콘 시럽‘과 전분 생산업체인 ’허빙거‘ 등을 거느리고 있는 다국적 기업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