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달마산-도솔봉에서 맞이하는, 언제나 처음인 아침

부산갈매기88 2011. 1. 8. 14:06

한반도가 가장 먼저 바다와 만나는 해남. 굽이돌며 바다로 향하던 산마루가 불꽃처럼 하늘로 솟구치고, 호수 같은 바다가 껑충 산마루로 올라 바위로 너울지는 달마산. 그 산으로 가던 날, 전국적으로 한파주의보가 내려졌다. 라디오에선 올해 들어 가장 추운 날이라는 호들갑이 끊이지 않았다.

“한겨울에도 아이와 장독은 얼지 않는다”는 속담이 떠올랐다. 어릴 적, 온 겨울이 그랬다. 보잘 것 없는 입성으로도 오그라들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모두들 곧장 남극으로 가도 좋을 옷을 입고서도 쩔쩔맨다. 조만간 고드름을 문화재로 지정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격세지감이다.


▲ 도솔봉에서 바라본 해질 무렵의 땅끝 바다. 내일 또 붉게 물들 아침 바다와 같으면서 다르고, 다르면서 같다. 날마다 우리는 새로 태어나는 세상을 산다.
달마산(489m)의 등성마루는 성벽 같다. 땅끝에 이르기 전 마지막으로 이 땅의 산천과 바다와 거기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굽어보는 듯하다. 얼핏 보면 쉬 다가서지 못할 얼굴이지만, 다시 보면 누구나 친구하고 싶은 달마대사 같기도 하다. 그 풍모는 미황사 자하루를 등지고 대웅전을 향해 올려다보는 것이 제격이다. 미황사 전각의 용마루와 석축은 달마산 암릉의 상승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달마산이 명창이라면 미황사는 고수(鼓手)이고, 바라보는 사람은 누구라도 귀명창이 된다.

미황사 자하루 돌계단을 내려서서 오른쪽으로 열린 숲길로 든다. 동백나무 숲길이다.

설핏 눈이 깔려 있다. 첫눈이지 싶다. 동백나무 잎에 걸러진 아침 햇살은 그림자로 길 위에 눕는다. 눈길은 푸르스름하다. 지난밤 달빛이지 싶다. 

▲ 불선봉에 도솔봉으로 흐르는 달마산 주릉의 서쪽 기슭.
동백나무 숲을 지나자 숲이 밝아진다. 조릿대 위로 알몸의 참나무 숲이 허허롭다. 나무 사이로 불선봉에서 떡봉으로 이어지는 암릉이 모습을 드러낸다. 헬기장에 이르자 시야가 활짝 열린다. 몸을 돌려세우면 송지면 일대와 호수처럼 잔잔한 남해가 아슴하다. 완만하게 산기슭을 에돌던 산길은 이곳에서부터 불선봉까지 너덜을 지나며 허리를 편다. 미황사에서 불선봉까지는 도상거리 1.4km.

불선봉은 달마산의 주봉이다. 불썬봉, 달마봉이라는 이름도 함께 쓰인다. 불썬봉은 ‘불  켜다’는 말을 ‘불 써다’라고 하는 이 고장 토박이말에서 비롯됐다. 지금도 봉수대가 옛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불선봉의 조망은 사방 거칠 것이 없다. 동쪽으로는 해남군 북평면 일대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완도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안개가 지운 거리감 때문인지 멀리 섬들은 커다란 물고기가 바다를 유영하는 듯하다. 서쪽 기슭에는 미황사가 푸른 비단에 싸인 듯 곱게 앉아 있다. 북쪽으로는 관음봉을 지나 두륜산으로 산줄기가 이어진다. 더 나아가면 월출산을 거쳐 호남정맥의 국사봉과 삼계봉 사이로 이어진다. 남쪽으로는 성큼성큼 암봉들이 도솔봉을 향한다. 도솔봉을 지나 허리를 낮춘 산은 한반도의 마지막 산봉우리인 사자봉(156m)에서 호흡을 고르고 땅끝(갈두마을)에 이른다. 북위 34°17′ 38″인 땅끝과 함경북도 온성군 남양면(南陽面) 풍서동(豊西洞) 유원진(柔遠鎭)은 한반도에서 가장 긴 사선(斜線)으로 이어지는 극남과 극북이다.

▲ 1 불선봉 북쪽의 두륜산과 완도. 2 서쪽 자락의 미황사. 먼 바다 위로 희미한 진도. 3 지난 밤 얼어붙은 달빛인 듯, 첫눈. 4 떡봉 동쪽 기슭의 편백나무 숲. 5 동백나무 활짝 웃는 이곳은 남쪽 바닷가 해남. 6 저무는 남쪽 바다.
달마산에 관한 가장 오랜 기록은 <동국여지승람>에 나온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7권 해남현 산천 조에, “달마산(達摩山)은 현의 북쪽 25리에 있다”고 간략히 언급한다. 상세한 기록은 제35권 영암군 산천 조에 나온다. “달마산은 옛날 송양현에 있는데 군 남쪽으로 1백 24리 떨어져 있다”고 적고는 고려 때의 승려 무외(無畏)의 기록을 길게 인용한다. 그 일부를 보면 이렇다.

“전라도 낭주(朗州, 영암의 고려 때 이름)의 속현인 송양현은 실로 천하의 궁벽한 곳이다.  그 현의 경계에 달마산이 있는데, 북쪽으로는 두륜(頭輪)에 접해 있고, 삼면은 모두 바다에 닿았다. 산허리에는 소나무와 참나무가 무성하여 모두 100여 척이나 되는 것들이 치마를 두르듯 늘어서 있다. 그 위에 아주 흰 돌이 우뚝 솟아 있는데 당(幢)과도 같고 벽과도 같다. 혹 사자가 찡그리고 하품하는 것 같기도 하고, 혹은 용과 범이 발톱과 이빨을 벌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며, 멀리 바라보면 쌓인 눈이 공중에 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 그 땅의 끝편에 도솔암이 있는데, 암자가 앉은 형세가 빼어나서 그 장관이 따를 만한 짝이 없다. 화엄조사 상공(湘公)이 터잡은 곳이다. 그 암자 북쪽에 서굴(西窟)이 있는데, 신라 때 의조화상(義照和尙)이 처음 살면서 낙일관(落日觀)을 닦은[修] 곳이다. 서쪽 골짜기에는 미황사 통교사가 있고, 북쪽에는 문수암 관음굴이 있는데, 그 상쾌하고 아름다움이 참으로 속세의 경치가 아니다.”

▲ 하숙골재에서 바라본 완도.
예나 지금이나 자연에 대한 감동을 글로 표현하는 일은 과장되기 마련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위의 기록은 지금도 사실에 가깝다. 산마루의 곧추선 암봉과는 대조적으로 미황사를 품은 서쪽 기슭과 동쪽으로 완도를 마주한 북평면으로 흐르는 산자락의 상록수림은 비단결처럼 부드럽게 흐르며 바닷마을 사람들의 삶을 어루만진다. 다만 “송양현은 실로 천하의 궁벽한 곳”이라는 표현은 갯벌에 의탁해 삶을 경영할 줄 몰랐던 시절의 모습이다. 그 궁벽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는 화수분 같은 자산이다. 격세지감이다.

불선봉에서 도솔암에 이르는 6km 정도의 산세에 대한 묘사는 이 시대의 어떤 문필가도 그 이상의 표현을 얻고자 한다면 과욕일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염치도 모르고 길게 인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덧보태고 싶은 건 신라 때 의조화상(義照和尙)이 처음 살면서 구도의 방편으로 삼았다는 ‘낙일관(落日觀)’이다.

낙일관(落日觀). 말 그대로, 지는 해를 지켜보는 일을 수행으로 삼는다는 것이겠다.

▲ 도솔암. 지는 해를 관(觀)하기에 이보다 좋은 곳은 없을 것 같다.
세계의 무상(無常), 무상하여 영원한 자연. 세상 이치가 이러할진대 인생무상이야 너무도 당연한 일. 아등바등하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부질없는가? 이런 가르침으로 새겨본다.

<동국여지승람>의 달마산에 대한 기림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어지는 전설은 달마산이 왜 달마산인지를 알게 한다.

“(…) 지원(至元) 신사년(辛巳年) 겨울에 남송(南宋)의 큰 배가 표류해 와, 이 산 동쪽에 정박했을 때 한 고관이 산을 가리키면서 주민에게 묻기를, ‘내가 듣기에 이 나라에 달마산이 있다 하는데 이 산이 그 산이 아닌가’ 하므로, 주민들이 ‘그렇다’ 하였다. 그 고관은 그 산을 향하여 예를 하고, ‘우리나라는 다만 이름만 듣고 멀리 공경할 뿐인데, 그대들은 이곳에 생장했으니 부럽고 부럽도다. 이 산은 참으로 달마대사가 상주할 땅이다’ 하며 그림으로 그려갔으니, 이 산은 이렇듯 위대하다. (…) 그러나 먼 고장에 있어 이 세상에는 동반하여 감상하는 자가 없으니 슬프다. 만약 세상을 버리고 도를 찾는 선비로서 절정에 올라 차가운 바람을 타고, 달마대사가 세상 밖으로 전하지 못한 묘함을 얻은 자가 있다면, 저 소림(少林)에서 진수(眞髓)를 얻은 자는 또한 어떤 사람일까.” 

▲ 도솔봉 서쪽 기슭에서 너머로 본 남해.
설핏 눈 내린 산길은 고독하다. 풀조차 자라지 않는 길 위의 눈만 대지로 스미지 못한다. 인간이 그 길을 만들었다. 직립하지만, 나무처럼 무심히 설 수 없는 인간은 어디론가 가야 하므로. 그래서 슬프다. 걷지 못하면 더 슬플 것 같아서, 나는 또 길을 찾는다.

도솔봉에서 지는 해를 본다. 언제나 처음인 아침이 거기 있다.


/ 글·사진 윤제학 동화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