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비즈니스

[글로벌 韓商 '경제 한류'의 주인공]'벙커 버스터' 만든 美 신대용회장

부산갈매기88 2011. 3. 11. 12:08

[4] 1달러로 시작, 12억 달러 美軍에 납품 신대용 DSE 회장
은퇴 방산 전문가에게서 방산업의 모든 것 배워
"대학때 월남 파병 반대로 고문당하기도 했지만… 이제와 생각하면 파병이 한국경제 동력"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13개월간 참전한 마이크 워커(Walker) 전 대령. 그는 2008년 11월부터 미국 방산업체 DSE에서 운영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

그가 말했다. "전쟁터 군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방아쇠를 당기면 반드시 총알이 발사될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는 다른 대기업 비즈니스맨과 다릅니다. 전쟁터의 생명을 생각하며 하나의 불량품도 허용하지 않는 철학을 갖고 있죠. 그는 대단한 애국자입니다."

신대용 DSE 회장이 MK19 기관총을 앞에 두고 40mm 자동기관총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이 총탄을 비롯한 10여종의 무기를 미 국방부에 납품하고 있다. 신 회장은“성실과 신뢰를 바탕으로 미 방산업계에 진출했다”고 말했다. /사진작가 로버타 라이트

워커 전 대령이 언급한 인물은 한국계 신대용(67) DSE 회장이다. 신 회장은 총탄뿐 아니라 지하 25m까지 뚫고 폭발하는 '벙커 버스터'를 만들어낸다. 그가 지난 10년간 미 국방부와 체결한 공급 계약은 12억달러(약 1조3450억원). 이를 통해 연간 2억달러의 매출을 올린다.

세계를 움직이는
미국의 심장부에 들어가 야전 군인이 목숨을 의지하는 무기를 공급하는 한국인. 신 회장의 미 주류사회 진출 과정은 드라마틱하다. 1달러를 주고 공장을 사서 현재의 DSE를 일궜다.

◆믿을 수 있는 사람

1971년 그가 미국으로 건너올 당시 수중엔 현금 200달러뿐이었다. 둘째 아이가 태어나는데 병원 갈 돈이 없고, 냉장고가 텅 빈 '절대 가난'을 경험했다. 1979년 자동차 부품공장을 인수하고, 1980년 현재의 DSE를 창업할 때까지 "안 해본 일이 없다"고 그는 말했다.

성공한 사람들이 그렇듯 지나온 시간과 단절돼 비약하는 결정적인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를 그도 맞는다. 그는 "그 순간은 자기 자신의 내면이 성숙해질 때 찾아온다"고 했다.

1979년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식료품점을 운영하던 신 회장에게 미국 변호사 에드워드 콜먼씨가 갑자기 전화했다. 플로리다 템파 집으로 와달라는 것이다. 콜먼은 그가 자주 나가던 볼티모어시 아시아문화센터에서 만난 변호사였다. 정작 도착한 곳은 작은 자동차 부품공장이었다. 콜먼 변호사는 두툼한 법률 문서와 펜을 건네고 받아 적으라고 했다.

'나, 신대용은 이 공장을 1달러에 인수하는 데 동의한다.'

망설이는 신 회장에게 콜먼 변호사는 말했다. "농담이 아니다. 너는 충분히 이 일을 할 수 있다." 그는 신 회장이 장기에 걸쳐 대금을 치를 수 있도록 보증했다. 신 회장은 "나중에 콜먼에게 '왜 나를 도왔느냐'고 물었지만 명확히 대답하지 않았다"며 "문화센터에서 나를 지켜보면서 성실한 사람으로 본 것 같다"고 말했다.

1여년 뒤 콜먼 변호사는 방산업 분야로 눈을 돌려보라고 조언한다. 그는 지역 신문에 20달러를 내고 경험자를 찾는 구인 광고를 싣는다. 돈이 없어서 '은퇴자 선호'라고 단서를 붙였다. 한 달 뒤 하얀 캐딜락을 탄 피터 디켐프라는 이름의 백발노인이 찾아왔다. 공장을 둘러보며 디켐프씨는 질문을 던졌다. "국방부 일을 할 수 있는 기술이 있느냐?" "자금은?" 신 회장의 대답은 거의 모두 "노(no)"였다.

국방부 컨설턴트이면서 수백만달러의 재산가인 디켐프씨는 시간당 6달러의 보수를 제시한 신 회장에게 일주일 뒤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하면서 승낙한다. '내가 커피 마시자고 하면 언제든지 마시고, 내가 점심 먹자고 하면 군말 없이 같이 먹을 것이며 내가 돈을 달라고 하기 전까지 기록만 해둘 것.'

그는 만 4년간 신 회장에게 국방부 계약서 작성과 기술 습득, 인맥 형성, 문제 해결 통로 등 방산업체 운영의 노하우를 가르쳤다. 디켐프씨는 7살 때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건너와 신문 배달을 하면서 포드 비행기 부사장이었던 양아버지를 만나 대학에 가고 성공했다. 그는 신 회장의 모습에서 과거의 자신을 발견했고, 양아버지에게서 받은 은혜를 자신이 베풀 차례라고 느꼈던 것이다. 신 회장는 "이제는 (다른 사람을 위해) 내가 베풀 차례"라고 말했다.

◆조국과의 불화와 화해

신 회장은
연세대 기계공학과 재학 중 월남 파병에 반대하면서 박정희 정권에 대항했다. 졸업 후 한국베어링에 근무하던 시절 중앙정보부 분실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2005년 미국 지역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가난과 고문이 싫어 한국을 떠났다"고 밝혔다.

세월이 지나면서 그의 생각은 변했다. "저는 6·25전쟁을 경험했습니다. 당시 피란길의 어머니들은 양손에 아이들의 손을 쥐고, 등에 또 하나의 애를 업고, 머리에는 살림을 이었죠. 그 피란길에서 살기 위해서 비정하지만 아이들의 손을 놓아야 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박 대통령이 바로 그 어머니였던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이 반대했던 월남 파병이 한국 경제의 동력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벌어들인 달러 가치보다도 우리 기술자들이 체득해서 돌아온 기술력이 그 후 건설산업 등을 일으키는 데 밑거름이 된 것 같아요."

신 회장은 "자신이 속한 사회에 꼭 필요한 인물이 되면 사회가 거꾸로 자신을 돌본다"고 했다. 그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백석꾼이 아니라 만석꾼을 꿈꾸라"고 당부했다.

☞美방산업계의 거대 한상 신대용 DSE 회장은

▶이민: 연세대 졸업 후 1971년 도미
▶회사설립: 1979년 자동차 부품업체 운영, 다음해 DSE 설립
▶사업장: 미국 플로리다 템파 본사 등 플로리다·사우스캐롤라이나 등지에 6개
▶매출: 미 국방부와 지난 10년간 12억달러 이상 계약.
▶주요 제품: 벙커 버스터, 5인치 주니 로켓, 155㎜ 포탄, 25파운드 폭탄

 

 

개프니(미 사우스캐롤라이나)=박종세 특파원 jspark@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