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

"새우깡에 맛 들인 해운대 갈매기와 달리 등명 갈매기는 전투기 같아"

부산갈매기88 2012. 1. 13. 06:52

사람들이 주는 새우깡에 맛들인 해운대 갈매기들 생멸치 쳐다보지도 않는데
한적한 등명해변 갈매기는 요격하는 전투기처럼 물속에 곤두박질쳐 사냥
사람 드문 바다에 와야 野性의 날것 볼 수 있는 세상

오태진 수석논설위원
부산 해운대 백사장은 겨울에도 전혀 쓸쓸하지 않다. 과자를 치켜든 사람들과 과자를 채 먹으려는 갈매기들 사이에 시끌벅적 유희가 벌어진다. 갈매기와 '새우깡 놀이'를 하는 사람들은 나이가 많고 적음이 없다. 갈매기가 과자를 채 갈 때마다 탄성과 환호를 터뜨린다. 인파 속에서 까치발을 하고 과자를 흔들던 아이들은 번번이 허탕을 친다. 결국 엄마 아빠 무동을 타고서야 신바람이 난다.

갈매기들은 과자를 좇아 이리저리 하늘을 덮으며 몰려다닌다. 과자에 정신이 팔린 갈매기들과 어느 순간 눈이 마주치면 섬뜩하다. 히치콕 감독의 영화 '새'에서처럼 잔뜩 화라도 난 듯 사나워 보인다.

리처드 바크의 소설 '갈매기의 꿈'에서 조너선 리빙스턴은 먹는 것보다 나는 것에 관심이 많은 갈매기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 조너선은 더 높이 더 멀리 날기를 염원하며 푸른 하늘을 날기만 하다가 무리에서 쫓겨난다. 그는 높이 나는 법을 터득한 뒤 돌아와 제자들을 기르고는 다시 길을 떠난다. 우아하게 비상(飛翔)하고, 날렵하게 물고기를 낚아채고, 사색하듯 갯바위에 올라앉은 갈매기들을 이제 해운대에선 볼 수 없다.

2007년 정월 대보름날 해운대구청이 '해운대 8경(景)' 중 으뜸이라는 '오륙귀범(五六歸帆)'을 재현하기로 했다. 옛 해운대 미포를 떠난 어선들이 오륙도 앞에서 고기를 잡은 뒤 만선(滿船)의 오색 깃발을 날리며 돌아오던 풍경이다. 어부들은 흥에 겨워 물고기를 갈매기들에게 던져줬다. 지는 해를 뒤로하고 고깃배를 쫓아 휘감아도는 갈매기떼가 장관이었다고 한다.

해운대구는 대보름 축제를 앞두고 시험 삼아 어선을 띄웠다가 당황했다. 생멸치를 푸짐하게 뿌려도 갈매기가 모여들지 않았다. 갈매기들은 유람선과 백사장 여행자들이 던져주는 과자에 맛을 들인 뒤 멸치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해운대구는 어선 예닐곱 척을 동원해 열흘 동안 오후마다 오륙도에서 해운대 앞바다까지 부지런히 돌게 했다. 그러면서 멸치를 무더기로 뿌렸다. 처음엔 스무 마리쯤 따라다니던 갈매기가 조금씩 늘어 대보름날엔 500마리를 넘었다.

겨우 행사를 치른 해운대구는 해마다 축제에 앞서 일주일쯤 갈매기 입맛을 되살리는 '훈련'을 시키느라 애를 먹는다. 과자 살이 두둑하게 오른 채 야성(野性)과 영혼을 잃어버린 갈매기들이 짠할지언정 나무랄 수는 없다. 900원 하는 새우깡 한 봉지로 주말 해운대 나들이를 즐기는 사람들을 탓하기도 어렵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해변엔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지 맙시다'라는 구청 플래카드가 내걸려 있다. '비둘기가 먹이를 찾아 생태계의 당당한 일원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라고 쓰여 있다. 정작 비둘기들은 갈매기떼에 눌려 거의 보이지 않는다. 간혹 두어 마리가 땅에 떨어진 새우깡을 눈치 보듯 주워 먹는다. 플래카드에 '비둘기'를 '갈매기'로 바꿔 써도 딱 들어맞는 말일 텐데…. 갈매기에겐 '먹이 주지 말라'는 얘기가 왜 없는지 궁금했다.

두 주 전엔 강화 석모도를 오가며 갈매기들을 만났다. 강화도 외포리 선착장에서 석모도 석포리 선착장까지는 1.4㎞, 카페리로 10분이 채 안 걸린다. 여행자들은 뱃전에서 갈매기에게 과자를 던져주며 짧은 뱃길을 즐긴다.

갈매기들은 바다 위에 웅크리듯 떠 있다가 카페리가 양쪽 선착장에서 움직이자마자 따라붙었다. 이곳 갈매기는 해운대 갈매기보다 더 영악했다. 과자를 채 가거나 공중에서 받아 먹으려는 갈매기가 드물었다. 대신 배 뒤를 슬슬 따라오다 바닷물 위에 떨어진 과자를 편하게 주워 먹었다. 과자를 주는 사람들에게 '묘기(妙技)'를 부려 보답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갈매기들 표정이 바보스러워 보였다.

외포리와 석포리 사이에 올해 연륙교가 착공된다고 한다. 다리가 놓이면 편리하겠지만 여행자들이 잠깐이나마 누리던 뱃길의 낭만은 사라질 것이다. 다리가 놓여 얻어먹던 과자도 사라지면 이 게으른 갈매기들은 또 어떻게 될까.

강릉 정동진 북쪽, 건널목도 없는 철로를 건너면 곧바로 등명해변이 펼쳐진다. 관광지 정동진과 연결된 해변이지만 걸어서 30분 가까이 걸리는 곳이어서 여름에도 한적하다. 한 달 전 등명에서 사냥하는 갈매기들과 마주쳤다. 바다 위에 점점이 하얗게 떠 있던 갈매기들은 높은 파도를 넘나들며 차례대로 물 위로 곤두박질쳐 물고기를 잡았다. 그 모습이 줄지어 요격하는 전투기 같았다.

거친 겨울 바다를 낮게 나는 야생의 갈매기들을 보며, 산 그림자 드리워 어둑한 바닷가에 한참이나 서 있었다. 사람 드문 바다에 와야 만날 수 있는 날것 야성(野性)이 반갑기도, 안쓰럽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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