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

어머니의 낚시터

부산갈매기88 2012. 7. 17. 07:56

가을 단풍이 차창에 가득히 담겨져 있다.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한 번도 내지 못한 빛깔로 사람들의 눈에 감동을 주고 있다. 같이 갈 것 같지 않던 이 권사도 같이 가게 되었다. 교회를 처음 개척한 조목사의 모친께서 돌아가셨다. 이미 교회를 사임하고 떠난 분이지만 교회에서 차를 대절하여 조문을 갔다. 틈만 있으면 그렇게도 조 목사를 비난하던 분이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다. 교회를 개척할 때 같은 교인이었다. 그 당시 교인은 우리 가정과 이 권사 가족만 남았다.

이 권사는 교회에서 매사 시어머니 노릇을 했다. 남편은 교회 장로였다. 기업을 경영하는 사장이었다. “처음 교회를 세울 때 얼마나 어려웠는지 몰라. 아마 우리가 없었으면 이 교회는 세워지지 않았을 거야. IMF 경제 위기 때 교회가 세워졌는데 우리 남편이 회계를 맡아 교회 어려움을 다 극복했어.” 이 권사는 틈만 있으면 교인들에게 자신들이 교회를 개척했다고 자랑을 하였다. 그래서 대부분 교인들은 박 장로가 교회를 세운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교회는 조 목사 가족이 시작하였고 첫 번째 교인이 된 것은 우리 가정이었다. 그리고 다섯 번째 교인이 된 사람이 이 권사 가정이었다.

조 목사는 사례를 받지 않고 목회를 하였다. 사모가 중학교 교사였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하였다. 소문이 잘 나 교회는 많이 부흥을 하였다. 일부 교인들이 교회 부지를 마련하여 건축을 하자고 제안하였다. 공동의회가 열렸는데 박 장로가 반대를 하였다. “지금 교회를 건축할 때가 아닙니다. 경기도 어렵고, 그리고 교회를 건축하려면 많은 자본이 필요합니다. 우리 교회 재정으로는 교회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 일에 자신의 일처럼 열심히 하는 서 집사가 발언을 하였다. “아닙니다. 무엇보다 우리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건축해야 합니다. 우리 다 내 집에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내 집에서 살면서 계속 교회는 월세로 살아야 합니까? 교인 250 여명이 되었으니 이제 우리도 교회를 건축합시다.” 그러나 박 장로는 끝까지 반대를 하였다. 이런 안건이 나오면 늘 그렇듯이 이 권사와 그의 친척들도 무조건 박장로 편을 들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답답하게 지켜보던 김 집사가 말했다. “ 이렇게 덕이 되지 못하도록 혈기 부리며 갑론을박하지 말고 다수결로 결정합시다.” 조 목사는 다수결을 반대하였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수결로 하자고 제안하였다. 박 장로와 그의 친척 그리고 그를 따르던 사람들만 반대를 하였다.

결국 교회 부지를 매입하여 건축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반대했던 박 장로는 수용을 하지 않았다. “유 집사, 어떻게 목사님이 그럴 수 있어, 다수결로 하면 두 패로 뻔히 나누어질 줄 알면서도 그렇게 해. 개척 할 때 재정을 담당하며 어려울 때 교회를 도왔던 우리를 목사님이 배신할 수 있어.” 이 권사는 나를 붙들고 하소연하였다. 그 후 박 장로는 대표 기도자로 예배 순서지에 나와도 기도하지 않았다. 예배는 참석했지만 맨 뒤에 앉았다. 그리고 조 목사의 설교를 노트에 기록하였다. 사람들에게 목사의 설교에 대하여 비난하였다. 이권사와 동생 이 집사는 교인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갖은 부정적인 말을 했다. “유 집사, 목사님 어머니가 시골에 계신 것 알아?” “그게 무슨 소리야?” “목사님, 어머님이 시골에 홀로 계시는데 일 년에 한 번도 찾아가지 않는데, 그래서 시골 동네 사람들이 돌보아 주고 있데, 동네 사람들이 목사도 아니라고 욕한데.” “그런 소릴 누구한테 들었어!” “그건 알 필요 없고.” 주일날이면 성가대를 끝마치고 이 집사는 대원들에게 목사를 비난하는 소문을 퍼뜨렸다. “목사님, 일주일에 한 번씩 교회에 없는 것 알아, 매 주일에 한 번씩 낚시를 간데. 젊을 때부터 낚시광이데.” 사람들은 술렁거렸다. 교회 건축한다고 하여 모두들 헌금 부담이 있는데 교회를 옮길 명분이 생겼다.

제직회 때 정식으로 박 장로는 문제를 제기하였다. “목사님, 시골에 어머님이 살아계시는 줄 아는데 일 년에 한 번도 찾아가시지 않는다면서요.” 조 목사는 웃으며 말했다. “우리 집에 모시고 살아야 하는데 성도님들께 부담을 줄 것같아 모시지 못하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시간이 많지 않아 잘 뵙지 못하고 있습니다.” “목사님, 일주일에 한 번씩 낚시를 하러 가신다면서요. 그 시간에 어머님을 뵈면 될 것이 아닙니까?” 가시 돋은 목소리로 박 장로는 압박하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서.” 박 장로와 박 장로를 따르는 50여명의 교인들은 교회 건축을 앞에 놓고 떠나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건축헌금에 부담을 느꼈는데 떠날 좋은 명분을 만난 것이다. 그러나 조 목사는 포기하지 않고 교회를 건축하였고 건축이 끝나자 박 장로는 다시 교회에 왔다. 조목사는 박장로를 다시 받아주었고 교회는 부흥이 되어 천여 명이 넘게 출석하였다. “이제 제가 이 교회에서 할 일은 다 한 것 같습니다. 저는 이 교회 담임 목사직을 사임하고 시골에 내려가겠습니다.” 조 목사는 이 말을 남기고 사임하였다.

그런 조목사의 어머니 장례식에 이 권사가 참여했다. 식사를 하는데 동네 사람이 말했다. “목사님, 참 효자입니다. 어머니가 두 발을 못 쓰는 소아마비 장애인입니다. 늘 교인들에게 부담을 준다고 모시지 못해 안타까워했습니다. 아버님이 낚시터에서 돌아가셨는데 어머니는 그 낚시터를 참 좋아했습니다. 목사님은 그 바쁜 중에도 매주 내려와 어머니를 업고 낚시터에 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을 함께 하기 위해 교회를 사임하고 어머니를 임종까지 정성껏 모셨습니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콩트집 하늘 바구니/2008.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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