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

'살인혐의'로 감옥서 14년, 출소 앞두고 채용 면접 본 35세 재소자 "얼굴도 모르는 15세 딸을…"

부산갈매기88 2012. 11. 2. 16:04

소 앞둔 어느 수형자의 채용 면접… 일주일 후 합격 통지 받아
유족에게 속죄하는 길 - 그분들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돈 벌어 다른 사람들 돕는 것
얼굴도 모르는 15세 딸과의 약속 - 실수한 아빠, 한 번은 용서
또 그러면 평생 안본다는 아이 그 애를 위해서도 취직하고싶어

"몇 년이나 있었지요?"

면접관의 첫 질문에 잠시동안 답을 하지 않고 바닥을 쳐다보던 이진수(가명·35)씨가 "14년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면접관은 "아, 14년… 오래 있었네요"라고 했다.

지난달 24일 서울 남부교도소에서는 출소가 얼마 안 남은 수형자들이 채용 면접을 보는 '구인·구직의 날' 행사가 열렸다. 경기도 소재의 한 가구제작업체에 지원한 이씨는 "면접 본다고 통보받은 1주일 전부터 잠을 못 잤다"며 "나 같은 사람을 누가 써줄까 걱정된다"라고 말했다.

이씨는 스물한 살 때 살인 혐의로 기소돼 징역 14년을 선고받았다. 어린 나이에 교도소에 들어왔기 때문에 그는 태어나서 한 번도 면접을 본 적이 없다. 이날 면접을 본 27명 중 생전 처음 면접을 보는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

길이 1.5m쯤 되는 책상을 두고 면접관과 이씨가 마주 앉았다. 10분간의 짧은 면접 내내 무릎 위에 얹은 이씨의 주먹은 꽉 쥐어져 있었다.

면접관이 "사람들은 왜 그렇게 오래 있었는지 궁금해할 텐데요"라고 말했다.

"14년 동안 하루도 그날이 떠오르지 않은 날이 없어요. 제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막살아서 무슨 짓을 했는지도 잘 몰랐어요. 교도소에 들어오고 나서야 저 때문에 가족을 잃은 분들을 떠올리며 괴로웠고, 죄송스러웠습니다. 그분들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잖아요. 열심히 돈 벌어서 다른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돕고 살겠습니다. 저 같은 재소자 거두어주는 작은 목공예 공장 만드는 게 소망입니다."

이씨의 이력서를 살펴보던 면접관이 "딸이 있네요?"라고 말했다.

"열다섯 살 때 부모님 이혼하고 집을 나와서 죽 혼자 살았습니다. 열여덟 살 때부터 동거했고, 스무 살에 딸을 낳았어요. 여기 들어오고 나서 아이 엄마는 집을 나갔고, 지금은 제 동생이 키우고 있습니다. 여섯 살 이후부터는 죄수복 입은 아빠를 기억한다며 면회를 안 데리고 와 얼굴도 못 봤습니다."

지난달 24일 서울 남부교도소에서 14년형을 선고받은 수형자 이진수(가명)씨가 생애 첫 면접을 보고 있다. 가구업체 사장인 면접관은 “내 얼굴이 나가는 건 상관없지만, 나를 아는 사람들이 신입사원인 이진수씨가 살인 사건의 범인이었다는 걸 알 수 있어 얼굴을 가리는 게 좋겠다”고 요청했다. /성형주 기자
이씨는 "6개월 전, 딸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젊었을 때 실수한 거라고 하니 한 번 봐줄게요. 한 번 더 그러면 그땐 평생 안 볼 겁니다'라고 적혀 있었어요"라며 "진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이고, 제가 꼭 취업을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라고 설명했다.

이씨는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는 질문에 "목수일은 자신 있습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씨는 8년 전부터 교도소 내에서 목공예 기술을 익혔다. 가구제작기능사 자격증을 땄다. 교도소 관계자는 "이씨가 목공예와 관련해 메모한 노트만 30권이 넘는다"며 "교도소 안에선 다른 재소자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쳐주는 선생님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면접관이 "출소 1주일 남았는데 기분이 어때요"라고 묻자, 잠시 머뭇거리던 이씨는 "무섭지요"라고 말했다.

"다 똑같은 옷 입은 사람들만 봤는데 서로 다른 옷 입은 사람들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상상이 안 됩니다. 잘 적응할 수 있을지 무서워요. 새 삶을 산다며 나갔다가 금방 다시 돌아오는 사람도 많이 봤어요. 그렇게 되지 말자고 다짐 진짜 많이 했습니다."

교정본부 관계자는 "오래 있었던 수형자일수록 첫 출발이 힘들다"며 "혼란을 겪다가 '에라 모르겠다'는 식으로 범죄를 저질러놓고 보는 경우가 흔하다"고 말했다.

면접을 마친 면접관이 "나와서 연락 줘요. 그때 한 번 더 봅시다"라고 말했다. 선뜻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던 이씨가 "정말 죽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 일어났다. 면접을 마친 이씨는 "8년 동안 열심히 기술을 배웠고, 자격증도 땄고 상도 탔다고 하니까 '우리 회사에 딱 필요한 사람인 것 같다'고 하더라. 태어나서 '네가 쓸모가 있겠다'는 말을 들은 건 처음"이라고 말했다. 이씨에게 14년 후에는 뭘 하고 있었으면 좋겠냐고 물었다. 이씨는 "그땐 내가 여기 면접관으로 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했다.

지난달 31일 출소한 이씨는 1일 최종 합격 통보를 받았다. 이씨는 딸과 함께 살 집을 마련하는 대로 첫 출근을 할 예정이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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