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호젓한 휴가 ' 경북 청송 주왕산

부산갈매기88 2020. 7. 22. 15:24


차로 갈 수 있는 적요한 계곡… 숲그늘서 뒷짐지고 트레킹


찻길로 이어지는 노루용추계곡

너구마을 등산로 순한길 이어져

방호정·백석탄 등 지질명소도


주방천 반대쪽 절골계곡 따라

손 담그고 탁족 즐기는 코스

산책하듯 가볍게 걸을 수 있어


비 많이 오면 계곡 길 잠겼는데

시멘트 깔고 징검다리 만들어

올해부터 물 가득한 풍경 만나



본격 휴가 시즌을 앞두고서 밀집 여행지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피서객들이 한꺼번에 몰리게 될 유명 국내 여행지가 혹시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의 거점이 되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가뜩이나 불가능해진 해외여행 탓에 국내여행 수요가 폭증하는 상황이어서 우려는 더 깊습니다. 이름난 피서지의 숙소는 진작 성수기 예약이 끝났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관광객들은 왜 이름난 관광지로만 몰릴까요. 여행지에 대한 고정관념, 혹은 여행하는 방식의 고착화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휴가의 목적지가 어디 바다와 계곡만 있겠습니까. 그리고 여행을 떠나서 해야 할 일이 어디 물놀이나 삼겹살 굽기뿐이겠습니까. 이름난 맛집에 길게 줄을 서지 않는다 해도 어떻습니까. 맛은 좀 덜할지 몰라도 소박하고 정성스러운 음식을 마음 편히 들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생각을 바꾸면 여행지가 가진 저마다의 매력이 보입니다.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것들만 찾아다니다가 미처 몰라봤던, 그런 곳으로 떠납니다. 바로, 여름의 청송입니다.


# 인기 없어서 권한다…여름 청송

휴가철을 앞두고 인적 드문 호젓한 여행지를 찾는 가장 손쉬운 방법. 계절 여행지를 다른 계절에 찾는 것이다. 계절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이름난 여행지는 거리 두기가 저절로 준수되는 한적한 ‘언택트’ 여행지가 된다. 이를테면 벚꽃놀이로 이름난 진해는, 이모저모 볼 것 많은 훌륭한 여행지이지만 봄 아닌 다른 계절에는 관광객이 아예 없다시피 하다. 벚꽃이 피면 온통 북새통의 여행지가 다른 계절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고요하다는 얘기다. 특정 계절에 극단적으로 관광객이 몰리는 사례이긴 하지만, 여행지 중에는 계절별로 방문객 차이가 크게 벌어지는 곳이 적잖다.

경북 청송을 휴가 여행지로 제안하는 것도 그래서다. 청송. ‘푸를 청(靑)’에 ‘소나무 송(松)’을 쓴다. 청송이란 ‘사철 푸른 소나무’를 이르는 말이다. 차가운 기운과 맑은 정신이 지명에서부터 묻어난다. 의문의 여지는 없다. 청송을 여행하는 최고의 계절은 가을이다. 울긋불긋 단풍잎이 기암과 어우러지는 주왕산 때문에도 그렇고, 다른 지역의 것과는 감히 겨룰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맛을 품은 청송사과가 붉게 익어가는 풍경 때문이기도 하다.

청송의 가을은 각양각색의 등산복을 차려입은 관광객들로 넘쳐난다. 하지만 계절을 비끼면 사정은 다르다. 여름 청송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뜸하다. 가을 단풍철에다 대면 10분의 1, 아니 20분의 1도 안 된다. 가을 단풍 시즌이라야 고작 며칠뿐이니 청송군은 그동안 다른 계절에도 관광객을 불러들이느라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별무소용이었다. 올여름, 청송을 가볼 만한 곳으로 추천하는 건 그래서다. 온통 단풍으로 물드는 가을의 주왕산보다야 못하겠지만, 장마의 뒤끝에 차고 맑아진 계곡과 하천이 청송 곳곳에 있다. 시원한 탄산 약수도, 뜨끈한 온천도 있다. 선명한 초록의 나무 그늘 아래서 부채 하나 들고 여름날을 보내기에도 청송은 썩 잘 어울리는 곳이다.


# 주왕산 주방천 대신 절골로

청송을 여름에 여행하는 것으로 계절을 비꼈다면, 이번에는 청송에서 관광객이 뜸한 곳을 골라 다른 여행자를 따돌리자. 청송을 대표하는 명소는 단연 주왕산. 주왕산을 대표하는 건 주방계곡이다. 주왕산의 거대한 암봉을 머리에 이고 있는 절집 대전사에서 출발해 주방천 물길을 따라 용추폭포, 절구폭포, 용연폭포로 불리는 1, 2, 3폭포를 다녀오는 트레킹이 대표적인 주방계곡 코스다. 주왕산에 간다면, 아니 청송에 간다면 이 길을 걸으러 가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암의 협곡으로 이뤄진 주방계곡의 경관이 그만큼 훌륭하다.

하지만 주방천 트레킹 못지않은, 아니 여름철 장마 이후라면 훨씬 더 나은 트레킹 코스의 계곡이 있다. 주왕산 정상을 기준으로 주방천 정반대 쪽에 있는 절골계곡이다. 주방천과 절골계곡은 비슷한 듯 다르다. 둘 다 기암 단애가 병풍처럼 펼쳐진 협곡을 걷는 길이긴 한데, 절골계곡 쪽이 물과 더 가깝다. 주방천은 물을 ‘보는’ 길이라면, 절골은 계곡 물에 손을 담그고 때로는 탁족을 즐길 수도 있는 길이다.

절골이란 이름은 계곡 깊은 곳에 구름과 물을 이름으로 삼은 ‘운수암(雲水庵)’이란 절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운수암의 이름은 200년 전 청송 출신의 선비 서원모의 책 ‘주왕산지’에 등장한다. “계곡 십 리 길이 끝나는 곳에 평탄한 언덕이 하나 있으니 바로 암자가 위치한 곳이다.” 주왕산의 가장 깊은 곳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는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옛 절터를 끼고 이어진다.

주왕산지에는 ‘주왕(周王)’이란 산 이름에 대한 설화도 적혀 있다. 서원모가 ‘매우 괴이하여 믿을 바가 못 된다’고 단서를 먼저 달아놓고 시작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중국 당나라 때 주도라는 사람이 스스로 ‘주왕’을 자처하고 진나라 재건에 나섰다가 실패한 뒤 주왕산으로 숨어들었다. 당나라는 신라에 숨은 주왕을 제거해 달라고 요청했고, 신라 조정은 마일성 장군을 보내 주왕을 잡아 죽였다는 이야기다. 주방계곡 입구의 대전사 대웅전 뒤편의 육중한 암봉이, 그때 주왕을 살해한 신라 장군이 기를 세웠다는 깃발바위, 즉 ‘기암(旗巖)’이다. 달아놓은 단서처럼 사실이라 믿기에는 터무니없지만,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는 건 아마도 주왕산이 가진 크고 장엄한 근육질의 경관에서 느껴지는 신령스러움 때문이리라.




# 지금 절골계곡을 가야 하는 이유

절골계곡을 따라 기암의 협곡으로 이어지는 트레킹 코스는 3.5㎞ 남짓. 덱을 걷고, 다리를 건너고, 때로는 하천을 딛고 건너는 길은 순하디순하다. 사실 길이 편하기로는 주왕산 주방계곡을 따를 곳이 없다. 주방계곡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용추폭포까지는 슬리퍼를 신고 유모차를 끌고도 다녀올 수 있을 정도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절골계곡 트레킹 코스도 순하기 이를 데 없다. 전체 코스가 거의 평지나 다름없다. 코로나19 시대에 지자체들이 권하는 이른바 ‘언택트 여행지’가, 죄다 해 볼 생각이 털끝만큼도 없는 등반 혹은 등산이나 다름없는 트레킹이어서 짜증 나는 사람이라면 주왕산을 권한다. 주방천이 됐든, 절골이 됐든 뒷짐 진 산책과 그리 다를 게 없는 편안한 걸음으로 자연의 깊숙한 속살을 보고 느끼고 올 수 있으니 말이다.

자칫 오해할까 싶어 덧붙인다면, 사실 주왕산은 기가 질릴 정도로 거대한 기암으로 이뤄진 만큼 ‘쉬운 산’은 아니다. 길이 순하다는 건 등산코스 전부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계곡을 끼고 이어지는 산의 무릎 아래까지만 그렇다는 얘기다. 주방계곡도 주봉(720m)까지 이어 오른다면 급경사의 오르막을 헐떡거리며 올라야 하고, 절골계곡도 가메봉(882m)으로 차고 오르려면 입에 단내가 나는 것쯤은 각오해야 한다. 여름 여행에 굳이 이런 고행 같은 산행을 할 이유는 없다.

절골계곡을 ‘지금’ 추천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사실 절골계곡은 여름에 자주 문을 걸어 잠갔다. 계곡을 바짝 끼고 이어지는 트레킹 코스라 계곡에 물이 많을 때의 정취가 가장 좋은데, 문제는 조금만 수위를 넘겨도 급격히 불어난 물에 길이 잠기고 만다는 것이다. 그동안에는 비가 40㎜ 정도만 내려도 계곡 길이 끊겨 주왕산국립공원 절골분소에서 출입을 엄격히 통제했다. 그러니 그야말로 계곡에 물이 ‘적당히’ 있을 때를 겨눠야 하는데, 여간 운이 좋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지난해 가을에 주왕산 국립공원사무소는 비가 좀 와도 절골계곡을 걸을 수 있도록 트레킹 코스를 만들었다. 물이 불어나면 잠기는 곳에다가 부분적으로 시멘트와 자갈을 비벼 길을 만들고, 그 위에 큰 돌을 박아 징검다리를 만든 것이다. 인위적인 구조물로 자연을 훼손했다며 항의하거나 비난하는 이들도 있지만, 분명한 건 이제 물이 가득한 절골계곡을 만날 수 있는 확률은 높아졌다. 비가 좀 내렸다는 것만으로 절골의 출입을 차단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니 올여름 장마 뒤끝에 절골에서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물이 가득한 계곡의 풍경을 만날 수 있다.


# 차로 갈 수 있음에도 가장 깊은 오지

주왕산국립공원에는 주방천과 절골 말고도 잘 알려지지 않은 또 하나의 계곡이 있다. 태행산 노루용추계곡이다.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계곡’이지만 이 계곡은 유일하게 차로 갈 수 있다. 역설처럼 들리겠지만 차로 갈 수 있음에도 가장 은밀하게 숨겨져 있다는 얘기다. 주왕산국립공원 월외리 탐방지원센터에서 노루용추계곡을 끼고 국립공원 한복판의 마을 너구동까지 교행 불가능한 실낱같은 3㎞ 남짓의 길이 이어진다. 지금은 이주해 흔적조차 희미하지만 주왕산에는 한때 ‘전기 없는 마을’로 이름났던 내원동이 있었다. ‘전기 없는 하룻밤’의 낭만을 위해 등산객이며 여행자들이 찾아들었던 곳이다. 너구동은, 그때의 내원동을 생각나게 한다.

너구마을은 온통 초록으로 둘러싸인 분지 마을이다. 한때 50여 가구가 살았다가 다섯 가구까지 줄었으나, 근래에 이주해온 이들이 하나둘 늘면서 가구 수는 열대여섯을 헤아린단다. 마을 입구에는 깔끔한 펜션이 하나 있는데, 마을 곳곳에 쓰러져가는 집을 일으켜 세우는 공사가 한창이라 번잡스럽긴 하지만 여기 묵는다면 계곡을 독채처럼 쓸 수 있을 듯했다. 너구마을에는 또 바위며 돌을 온통 금색과 은색으로 칠해 놓고, 문어, 홍어, 독수리, 코끼리, 호랑이, 미륵불, 염라대왕까지 닥치는 대로 만들어 금색과 은색을 칠한 조형물을 마당에 가득 세워놓은 기이한 절집 ‘우천사(雨天寺)’가 있다.

‘너구’란 마을 이름이 너구리에서 온 것인가 했는데, 마을 주민은 네 개의 산줄기와 네 개의 물줄기가 만나는 명당이라 ‘네 귀퉁이가 만나는 땅’이란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다. 너구마을의 행정구역 명은 월외2리다. 월외(月外). 그러니까, ‘달의 바깥’이다. 노루용추계곡을 거느린 태행산의 옛 이름이 월외산이었다. 노루용추계곡의 호젓함은 이런 서정적인 이름에 값한다.


# 땅이 만든 그림… 폭포·단애·암봉

월외마을에서 너구마을로 이어지는 길에 달기폭포가 있다. 달기폭포 아래쪽에 작은 폭포가 있는데 그 밑에 깊고 맑은 소(沼)가 계곡 이름으로 삼은 ‘노루용추’다. 노루용추계곡으로 향하는 여정의 하이라이트는 계곡이나 마을이 아니라, 찻길이 끝나는 너구동에서 금은광이로 이어지는 등산로 초입의 아름다움에 있다. 너구마을에서 금은광이 삼거리로 이어지는 등산로는 온통 짙은 숲 그늘로 뒤덮여 있는데, 마을을 출발해 1㎞쯤 순한 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면 산촌마을의 옛 흔적이 뚜렷하다. 여름 휴가철에도 인적이 드물다. 굳이 등산로를 다 밟지 않아도 서늘한 숲 그늘에서 뒷짐 진 가벼운 트레킹만으로도 충분한 위안과 휴식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주왕산 말고도 청송에는 갈 만한 데가 여러 곳 있다. 2017년에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등재된 청송은 스물네 곳의 다양한 지질명소가 있다. 지질이라니 무슨 학술여행 답사지쯤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따지고 보면 까마득한 벼랑이나 근육질의 암봉, 기암괴석, 폭포 등 청송이 가진 거의 모든 경관 명소가 전부 지질자원이라 할 수 있다. 청송의 지질명소 중에는 주방계곡이나 기암 등 이름난 것들도 있지만, 잘 알려지지 않았으되 여행 목적지로 매력이 넘치는 곳들도 있다. 부남면 구천리의 병암 단애, 신성계곡의 정자 방호정 일대, 안덕면 고와리의 백석탄과 지소리의 만안자암 단애 등이 그런 곳이다. 병암 단애는 천변에 140m 높이의 까마득한 벼랑이 말 그대로 병풍처럼 서 있는 곳이고, 방호정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 어머니를 생각하며 천변에 지은 빼어난 정자다. 백석탄은 개울 바닥의 회백색 바위가 풍화와 침식을 거치는 동안 깎여 빚은 절경이다. 이들 지질명소는 모두 주민들이 멱을 감곤 하는 한적한 물길을 끼고 있어 물놀이도 겸할 수 있다. 계절을 비끼고 시간을 비껴 붐비지 않는 곳으로 떠나는 휴가. 올해 여름휴가에는 부디 ‘누구보다 가장 잘 놀겠다’는 전투적 결심은 그만 내려놓으시길…. 그리고 앞으로 계속될지도 모르는, 덜 유명하고, 덜 붐비는 곳으로, 덜 맛있는 음식을 먹는 여행에 대해 생각해 보시길….


■ 고즈넉한 한옥 숙소 ‘청송민예촌’

청송의 주왕산국립공원 입구에 소노벨 청송(옛 대명리조트 청송)이 있다. 2017년에 개관한 데다 관리를 잘해 객실이나 부대시설이 새것이나 다름없다. 휴가의 절정만 피하면 평일 객실은 여유가 있다. 국내 숙박예약사이트보다 다국적 예약사이트에서 10%쯤 더 싸게 예약할 수 있다. 4인 투숙 패밀리 객실 1박에 10만 원 안쪽. 청송문화관광재단에서 운영하는 한옥숙박촌 ‘청송민예촌’도 추천한다. 8채의 크고 작은 한옥으로 이뤄진 숙박시설인데, 한 채씩 통째로 빌리거나, 방을 하나씩 빌려서 묵을 수 있다. 2인 숙박용 방이 4만 원부터. 방 4개와 널찍한 마루, 광 등을 갖춘 한옥 전체를 51만 원에 빌려주기도 한다. 청송에는 달기약수와 신촌약수가 있는데, 약수탕 주위에 닭백숙 집이 즐비하다. 백숙을 내기 전에 고기를 다져 석쇠에 구운 닭불고기를 내놓는 ‘닭불백숙’으로 이름난 ‘신촌식당’(054-872-2050)이 가장 이름난 곳. 다만 ‘약수터 백숙’은 취향에 따라 선호가 극명하게 갈린다. 관광지 식당보다는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맛집으로 통하는 청송읍의 ‘사과밭에돈돈’(054-872-3475)을 추천한다. 짜글이, 돼지연탄구이 등의 소박한 메뉴를 낸다.

한겨레신문 2020/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