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식히기

빠시 소테 해라?… 주방장님, 어떻게 요리하란 거죠

부산갈매기88 2020. 9. 23. 08:43

“너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반드시 테이블(탁자) 오더(주문) 순서대로 음식 만들어야 한다는 거 몰라? 알단테(겉은 익고 속은 단단한)로 하라고. 못 들었어? 스토브(화덕) 비워.”

“예, 셰프(주방장님)!”

 

과거 인기리에 방영된 TV 드라마 ‘파스타’ 속 대화다. 주방장 최현욱(이선균)은 이탈리아 현지에서 요리사 공부를 한 해외파. 대사 속 대부분의 단어가 영어이고, 조사 정도만 한국어다. 최근 국내 식당 주방에서도 유학파가 많아지면서 영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대표적인 단어는 요리사를 뜻하는 ‘셰프’. 요리연구가 홍신애가 한 방송에서 “젊은 남자가 요리하면 셰프고, 나이 든 여자가 요리하면 다 아줌마냐”는 농담을 했을 정도다.

 

젊은 요리사들 말에 영어가 많다면, 고참 요리사들 말엔 일본어가 많다. 특히 오래된 호텔에서는 교육을 위해 일본 유명 요리사를 선생으로 데리고 오는 경우가 많았기에 그들에게 요리를 배운 제자들은 습관적으로 일본어를 사용한다.

“빠시(남은 것들) 있어? 빠시로 버거 패티 만들면 돼” “이거 소스 와까리(분리) 났는데?” “소스 노바시(풀기) 좀 해놔라” 등등. 조선호텔 관계자는 “과거 호텔 식당에선 일본 주방장들의 지배력이 강했다 보니 습관처럼 일본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신구 요리사들 사이 소통이 안 되는 경우도 생긴다. 세계적인 요리학교 ‘르꼬르동 블루’에서 요리를 배웠고, 현재 신세계센트럴시티에서 호텔 관리와 요리 강의를 하는 차승희 콘텐츠기획팀장은 “호텔 주방은 인턴부터 총주방장까지 20~50대가 모여 있다 보니 일본어가 편한 50대와 영어가 익숙한 20~30대 간 의사소통이 가끔 안 되기도 한다”며 “서양 요리는 불어에서 파생된 용어가 많아 어쩔 수 없지만, 외국어를 지나치게 남발하는 건 사실”이라고 했다. 대표적인 경우가 레시피(조리법), 오더(주문), 픽업(음식 가져가기), 솔드아웃(품절), 믹싱(섞기), 휘핑(거품) 등이다. 이런 현상은 유명 요리사들이 출연하는 TV 프로그램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미국 뉴욕 CIA를 졸업하고, 뉴욕 르 베르나르뎅과 시카고 식스틴 트럼프 호텔, 프랑스 파리의 조엘 로부숑 등에서 요리를 배운 인용빈 에토레 수석주방장은 "최근 식당들이 해외파 셰프들을 선호하는 분위기 때문에 많은 주방장이 한국어보다는 영어·불어를 쓰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고 했다.

 

일본어는 조리와 관련된 단어가 많다. 과거엔 요리 학원보다 식당에서 직접 고참들에게 바닥부터 배우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모리 해라(모아라), 시마이 해라(끝내라), 아라이(설거지), 오로시(생선 포를 뜨다) 등이 대표적. 차승희 팀장은 “일본어는 나이 든 주방장들이 떠나면서 함께 사라지고 있어, 요즘 대세는 영어가 됐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2020/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