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

어느 탈북자의 절규 간증(이옥 선교사)

부산갈매기88 2010. 10. 20. 17:26

10년 전에 북한을 탈출해서 남한으로 온 탈북녀 이옥(리옥) 선교사의 간증을 어제(2010. 10. 19) 저녁 본 교회에서 들었다.

 

그녀는 평안북도 구성시에서 출생하여 신의주 지휘본부 경비대 선전선동원 하사로 7년간 복무했다. 그녀는 부모와 동생의 배급을 받아 놓고 입대해야 했지만, 배급이 나오기 하루 전에 입대하는 바람에 배급을 타 주지 못했다고 한다.

 

군에 복무를 하는 중 고향으로부터 소식을 전해듣는다. 부모가 돌아가셨으니 집으로 와 달라는 전갈이었다. 부모가 돌아가신 지가 며칠 되었지만, 신상 확인이 안 되어 장례식을 못 치르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고향으로 달려가 보니, 아버지와 어머니는 먹지를 못해서 굶주려 죽어 있었는데,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지금까지 그가 당과 수령을 위해 열심히 사상교육을 받고 선전선동원으로 일해 왔지만, 소위 지상낙원이라는 곳이 먹는 것도 제대로 해결이 되지 않는 것을 보고 회의를 느낀다. 못 먹어서 굶어 죽어간 부모를 생각해 볼 때 도저히 그 땅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인식했다.

 

무엇보다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서거 이후 3년 정도 배급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북한 땅에는 아사자가 3백만이 나왔다고 하며, 풀뿌리나 이파리 등의 굶주림을 채울만한 것은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한다. 주민들은 너무나 배가 고픈 나머지 흙을 주워 먹다가 장염, 설사 등 각종 질병에 걸려서 수십만의 사람들이 쓰러졌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심지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그들의 손자를 삶아 먹는 일까지 비일비재하였다고 한다. 여기저기서 배고픔에 지쳐서 인육을 먹었다는 소식은 많이 들렸다고 한다.

 

한 끼의 식사마저도 오랫동안 먹지 못한 주민들은 정신이 혼미한데다 정신착란증에 걸린 사람이 수십만이 나왔다고 했다. 현재 북한 주민은 너무 많이 죽어버려서 1천 3백만 ~ 1천 5백만 정도 밖에 되질 않는다고 했다.

 

그녀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 어린 동생을 등에 들쳐업고 압록강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는 그 길이 그렇게 먼 길이라는 것은 알지 못해서 옥수수 한 개도 가져가지 못했다. 벼랑에 굴러 떨어지기를 수십 번 그녀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너무나 배가 고파서 헛것이 보였다고 한다. 17박 18일 동안의 천신만고 여정 끝에 압록강을 건너게 되는데, 살얼음이 녹을 때라 얼음이 깨어져 여러 차례 강물을 마시게 되었다.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그만 그녀는 등에 업고 있던 동생을 압록강에 떠내려 보내고 만다.

 

그녀는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동생을 떠내려 보냈다는 죄책감과 함께 그녀도 강물에 떠내려가게 되었다. 이후 정신이 차렸을 때에는 어느 조선족 집에 누워 있었다. 그곳을 지나가던 조선족이 그녀를 건져 준 것이다. 그녀는 아버지의 친척들이 살고 있다는 도문(투먼)시로 향했다. 과연 친척들은 잘 살고 있었다. 반갑게 맞아 주었다고 한다.

 

친척들은 탈북을 잘 했노라며 그녀에게 음악학원을 차려 주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조선족으로 일제 시대 때 상해에서 음악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런 영향으로 그녀도 어느 정도 음악적 재능이 있어서 아코디언 등은 곧잘 연주했다고 한다.

 

음악 학원을 차리고 있을 때, 매일 찾아오는 한국 선교회의 목사님이 계셨단다. 예수님을 영접하라고 매일 이야기했단다. 그러나 그녀는 어릴 때부터 북한에서 세뇌되어 자란 것이 미괴뢰와 남한 괴뢰, 그리고 기독교는 철두철미하게 배척하라고 교육을 받아 왔었단다. 그런 그녀가 목사의 말을 곧이 들어줄 리는 만무했다. 목사는 그녀를 매일 찾아와 안수기도를 해 주고 가곤 하였다.

 

그 목사가 5개월 정도 매일 찾아 오게 되었을 때 그녀에게 테이프를 한 보따리 갖다 주었다. 그녀는 그 곡은 들오보니 북한에서 많이 들었던 김일성이나 김정일의 우상화에 쓰인 곡들이 일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낯설지가 않은 곡이 몇 곡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중국 도문시에서 학원도 반 년 정도 자리를 잡아가던 어느 날 학원이 잘 되는 것을 시기한 조선족의 고발로 중국 공안에 잡혀 가서 도문시 감옥에 들어가게 된다. 이제 내일 오후 4시면 북녘 땅으로 돌려보내지게 된다고 통보를 받았다. 친척들은 그녀가 감옥에 들어갔다는 소식에 전부 등을 돌리고 감옥에 면회도 오지 않았다고 한다. 완전히 버려진 자신을 생각하며 신세한탄을 했단다. 누구나 자신이 피해를 입을 짓은 아무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수갑이 채워진 채로 감방에 갇혔는데, 신세가 너무나 한탄스러워 팔을 흔들어대니 수갑은 더욱 조여들었다. 지나온 인생 나그네 길이 너무나 답답하여 머리와 이마를 감옥 창살에 부딪혀 피를 쏟아보지만 어쩔 수 없음을 느꼈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이제 체념의 상태가 되었다. 그때 그녀는 5개월 동안 찾아오던 목사님의 안수기도와 그녀에게 준 테이프의 곡이 생생하게 떠올랐다고 한다.

 

그녀는 감방에서 무릎을 꿇고 엎드려 기도했다고 한다. 한 번만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단다. 도저히 사람이 살지 못하는 죽음의 땅 북녘에는 안 끌려가게 해 달라고 난생 처음 눈물로 하나님께 온 밤을 기도드렸다고 한다.

 

드디어 날은 밝았고, 끌려가야 할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북한으로 송환될 사람은 그녀 말고도 세 사람이 더 있었다. 그런데 그 북한으로 송환되기 1시간 전 도문시의 공안국장이 그녀를 자기 방으로 불렀다.

 

그는 그녀가 자신의 딸과 얼굴 생김새도 같고, 나이도 22살로 똑같다고 말했다. 그 딸은 죽었다고 말했다. 그녀를 보니 자신의 딸이 생각난다고 끌어안고서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혹시 소원이 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미 세 명의 다른 여죄수들은 1시간 전에 북한으로 송환되었고, 그녀만 남겨진 상태였다.

 

그녀는 그렇게 찾아오던 목사님에게 전화 한 통화만 하게 해 달라고 했다. 그 목사와 그녀는 통화가 되었고, 승용차로 1시간 남짓 되는 거리를 목사님은 단숨에 달려 왔단다. 그녀는 공안국장의 배려로 석방이 되어 목사님과 함께 연길로 향했다. 인생이 이렇게 반전이 이루어지게 되었음에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이제 자유의 몸이 된 기분이었다. 연길(옌지)의 한 아파트 앞에 도착하니, 목사님은 그녀에게 먼저 방문을 열고 들어가라고 했다.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누나!!!”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압록강물에 떠나보낸 동생에 살아서 그곳에 있었다.

 

지난번 강물에 떠내려 온 동생을 한 주민이 이곳으로 데려다 주었단다. 하나님의 오묘하고 신묘막측한 계획에 의해 이미 만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녀와 동생은 서로 끌어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녀는 2001년 10월 대한민국으로 들어오게 된다.

하나님과의 기적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다. 단지 우리는 그런 기적을 믿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녀의 간증 내내 수많은 할머니와 성도들은 눈물을 흘렸다. 오늘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으며, 이 세계는 영이 지배하는 세상임을 깨닫게 되었다.

 

 

<지식경영자(CKO)/ 부산갈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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