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불 밝히는 애기봉

부산갈매기88 2010. 12. 16. 08:03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파주 오두산 전망대로부터 서해 바다에 이르는 강을 조강(祖江)이라고 한다. 지금은 한가운데 남북한 경계를 알리는 부표(浮標)가 떠있고 아무도 건널 수 없는 슬픔의 강이다. 조강의 남쪽, 김포반도의 끄트머리에 있는 높이 154m의 야트막한 봉우리를 옛날에는 쑥갓머리산이라고 불렀다.

▶병자호란 때 일이다. 청나라 군대가 쳐들어오자 평안감사가 사랑하는 여인과 피란길에 올랐다가 개성 근처에서 청군을 만나 싸우다 붙잡혔다. 구사일생으로 강을 먼저 건너온 여인은 날마다 쑥갓머리산에 올라 임이 오기만을 눈물로 기다렸으나 감사는 끝내 오지 않았다. 여인은 북녘이 잘 바라다보이는 쑥갓머리산 꼭대기에 자신을 묻어달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

▶쑥갓머리산 일대는 6·25전쟁의 격전지다. 해병 독립 5대대는 1·4후퇴 이후 중공군·인민군과 50여 차례나 전투를 치르며 쑥갓머리산을 지켜냈다. 해병대는 휴전 이듬해인 1954년 12월 쑥갓머리산의 소나무에 작은 전등불을 밝혀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었다. 남쪽으로 오고파도 못 오는 북녘 동포들에게 보내는 자유와 평화의 메시지였다. 1966년 박정희 대통령이 쑥갓머리산에 들렀다. 대통령은 "사랑하는 이를 잃고 북녘 하늘 바라보며 통곡하다 죽은 여인의 한(恨)이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가지 못하는 우리 겨레의 상심(傷心)과 같다"며 이곳을 애기봉(愛妓峯)이라 부르자 했다.

▶애기봉에서 강 건너 북한 땅은 1.8㎞다. 트리에 불을 켜면 개성에서도 훤히 보인다고 한다. 대적봉 도라산 등 휴전선 최전방 30여곳에서도 애기봉을 따라 매년 성탄절과 부처님오신날이면 북녘을 향해 구원의 등탑(燈塔)을 밝혔다. 그러나 애기봉 점등이 50년을 맞은 2004년 겨울부터 더 이상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북한이 "애기봉 등탑이 우리 주민을 자극한다"며 군사분계선 지역에서 선전활동 중지를 요구했고 우리측이 이에 합의해준 탓이다.

▶7년 동안 꺼져 있던 애기봉 등탑에 올 크리스마스부터 다시 불이 들어온다는 소식이다. 1차 세계대전 때 유럽 서부전선의
독일군 참호 위에 세워진 크리스마스트리는 연합군과 독일군을 극적인 '크리스마스 휴전'으로 이끌었다. 애기봉의 크리스마스트리 불이 꺼진 사이 북한은 핵을 개발하고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을 저질렀다.

 

김태익 논설위원 tikim@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