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식히기

물려주고 싶은 한 권의 책] 누구나 한 번쯤 묻죠. 고통의 순간 神은 어디?

부산갈매기88 2011. 1. 24. 08:57

[물려주고 싶은 한 권의 책] 화가 김병종… '침묵'

화가이면서 저술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는 김병종(58) 서울대 미대 교수는 20대 중반의 아들 둘을 두고 있다. 김 교수는 "아들들이 신(神)에 대해, 인간에 대해, 죽음과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 치열하게 사색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인 그는 막부(幕府) 시대의 가톨릭 박해 사건을 소재로 한 일본 작가 엔도 슈사쿠(遠藤周作·1923~1996)의 소설 '침묵(沈默)'(1966)을 아들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으로 꼽았다.

포르투갈의 예수회에서 일본에 파견됐다가 붙잡힌 젊은 신부(神父) 로드리고는 "예수의 얼굴이 그려진 성화(聖畵)를 밟고 배교(背敎)하면 고문당하고 있는 신도들을 살려주겠다"는 제안을 받고 갈등한다. 신부는 끊임없이 기도하며 신에게 답을 구하지만 신은 계속 침묵만 지킨다. 로드리고 신부가 '이 고통의 순간에 신은 왜 응답하지 않는가'라는 처절한 회의(懷疑)를 거듭하면서 신앙의 본질을 탐구하는 과정이 작품의 주 내용이다.

지금까지 ‘침묵’을 세번 읽었다”는 김병종 교수는“어떤 신학서적 보다도 더 절실하게 실존의 무게를 안겨준다”라고 했다. /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

김 교수는 대학원생이던 1980년대 초반 서점에서 우연히 '침묵'을 발견했다. 책은 당시 예술가적 기질과 교회가 요구하는 모범적인 신앙인상(像)의 간극 때문에 방황하던 그를 순식간에 빨아들였다. "어머니는 제가 다른 형제들처럼 굳건한 믿음을 지니길 바라셨지만, 저는 거기에 부응하지 못했어요. 신과 저 자신의 관계에 대한 확신이 없었죠. 기독교 선교사에는 순교 등으로 신앙의 절개를 지킨 영웅들의 이야기가 많이 전해오는 데 비해 '침묵'은 한 신부를 통해 변절과 실패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 인상적이었어요. '내가 고통받을 때 신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신부의 질문이 당시 제가 겪고 있던 신앙의 딜레마와 일치하기도 했죠."

소설은 성직자로서 따라야 할 교리(敎理)와 인간의 도리 사이에서 고뇌하던 신부가 마침내 성화를 밟기 위해 발을 들고, 그 순간 침묵하던 신의 목소리가 들려오면서 절정을 이룬다. 그 장면을 읽었을 때의 충격을 김 교수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신부의 귀엔 이런 말이 들립니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질 것이다.' 신부가 성화에 발을 올려놓았을 때 아침이 오고, 멀리서 닭이 울지요. 책장을 덮자 그 장면이 환영(幻影)처럼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졌어요. 사방에서 헨델의 '메시아'가 울려 퍼지는 듯했죠."

'침묵'이 남긴 강렬한 인상은 그의 작품세계에도 큰 영향을 줬다. 절규하는 예수의 모습을 주로 그렸던 1980년의 '바보 예수' 연작, '흑색 예수' 등은 모두 '침묵'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회의하고 쓰러지는 나약한 신부의 실존이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울부짖었던 예수의 모습과 겹쳐졌어요. 성전(聖殿)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걸려 있는 성화보다 인간과 함께 고통받고 신음하는 신의 모습이 더 의미 있다는 걸 깨달았죠. 그리고 그 모습을 그려야겠다고 결심했지요."

김병종 교수는 "'침묵'은 기독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감명을 받을 수 있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침묵'의 주제는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에요. 그 물음은 우주(宇宙)와 존재의 관계에 대한 질문으로 확장될 수 있죠. 인간이라면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 그런 질문을 던지게 되지 않나요?"

 

곽아람 기자 aramu@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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