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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 불량의 운전자들/다시 생각나는 '양심 냉장고'

부산갈매기88 2011. 3. 3. 11:35

신호가 바뀌는 것을 조금 늦게 본 탓에 차를 세우기 어려웠다. 속도가 조금 빨랐던 탓도 있다. 급하게 튀어나오는 오토바이도 사람도 없어서 사고 없이 무사히 교차로를 통과할 수 있었지만 경찰한테 걸릴까 불안했다.

"차가 옵니다. 설까요? 아, 그냥 지나가는군요. 또 차가 옵니다. 이번에는 설까요? 또 지나갔습니다. 밤은 깊고 날은 춥지만 신호를 지키는 차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차가 또 옵니다. 아, 또 그냥 지나갑니다."

아무리 깊은 밤이라지만 신호를 지키는 차가 단 한 대도 없다는 것은 충격이었다. 그래서 그 컴컴한 화면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충격'이 아니라 '일상'이었다. 한낮에도 신호를 무시하고 중앙선을 침범하고 횡단보도를 점령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상이었다.

그래도 한 가닥 양심은 살아 있었다. 아주 조그만 차가 정지선 앞에 서고, 그 차가 서 있는 동안에도 몇 대의 차량이 신호를 무시하고 교차로를 지나 사라졌지만, 그 작은 차는 신호가 파란불이 바뀌도록 서 있다가 출발했다. "신호는 왜 지키는 겁니까?" "저는 늘 지켜요." 천천히 힘겹게 대답하는 장애인 운전자의 대답에 눈물을 흘렸다.

한 방송사가 이 프로그램을 내보낸 뒤 15년이 지났다. 오늘도 많은 차들이 도로를 질주한다. 신호를 지키는 차도 무시하는 차도 있다. 횡단보도 정지선 앞에 서는 차도 있지만 횡단보도 안으로 마구 들어가는 차가 더 많은 것은 내 눈에만 보이는 환상일까.

15년 전 '양심 냉장고'의 감동은 잊혀지지 않았지만 일상은 지금도 달라진 게 없다.

※3월 '일사일언'은 정재환씨를 비롯해 이선경 2011조선일보신춘문예 문학평론부문 당선자, 음악평론가 이용숙씨가 번갈아 집필합니다.

 

  • 정재환 방송사회자 한글문화연대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