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관계

"생수 하나 증산 못하는 '이상한 일본' 반성합니다"

부산갈매기88 2011. 5. 16. 07:38

3·11 대지진 2개월… 日 자성의 목소리 거세
생수병 뚜껑이 모자라… 표준화 소홀 뚜껑만 200여종, 생수 만들어놓고도 속수무책
대통령제 도입하자 - 재해복구 못하는 힘없는 총리, 전권 행사할 수 있게 개헌을
소통부족 전문가 문화 바꿔야 - 의연금 2조3000억원 걷고도 두달간 분배방법에 허송세월

"지금까지 원전 문제와 정치에 무관심했습니다. 그 결과가 이런 사고로 이어졌다는 것에 대해 정말 아이들 볼 면목이 없습니다."

일본의 인터넷 블로거 '후쿠시마 아줌마'는 지난 8일 '저도 반성합니다'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3·11 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福島) 원전사고가 일어난지 두 달. '안전과 과학기술의 일본'이라는 신화가 무너지면서 일본인 스스로가 일본 사회문화 전반에 대해 거센 반성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표준화 안돼 생수병 뚜껑만 200종

일본인들은 과학기술·제조업 등에서 세계 1등이라던 일본식 시스템의 실체에 충격을 받고 있다. 대지진·쓰나미 이후 재해지역뿐만 아니라
도쿄 등 전국에서 '생수 품귀 현상'은 일상화됐다. 일본 정부는 당초 지진 피해가 없는 오사카·나고야 등 서일본 지역에서 생수 생산을 대폭 늘리면 문제가 쉽게 해결될 줄 알았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벽을 만났다. 생수병 뚜껑 종류가 200개가 넘을 정도로 크기도 디자인도 제각각이어서 생산을 늘리는데 한계가 있었다. 표준화를 소홀히 한 결과였다.

외국으로부터 수입도 쉽지 않았다. 생수 품질검사 기준이 외국과 달라 수입절차가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외국 생수만 팔리는 도쿄… 일본 도쿄도가 수돗물에서 유아에게 영향을 미칠 정도의 방사성 물질이 검출됐다며“출생 1년 이하의 유아에겐 수돗물을 먹이지 말라”고 발표한 23일 오후 도쿄 시내 편의점의 프랑스산 (産) 생수 코너에서 한 주부가 손에 잡히는 대로 물병을 바구니에 담고 있다. 발표 직후 유아를 둔 가정은 물론 성인들도 수입 생수 사재기에 나서는 등 일본이‘물 쇼크’에 빠졌다. 기존에 방사성 물질이 검출된 야채와 유제품, 수산식품보다 물 오염 공포는 훨씬 클 것이란 전망이다. /로이터 뉴시스

◆장인에게 맡기고는'나몰라 문화'

장인(匠人)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전문가 문화도 문제라는 반성이 나왔다. 일반 국민과 소통 없이 전문가에게만 의존한 장인 문화가 오히려 위기를 키웠다는 것이다.

지난 20년간 일본 원전을 취재했다는 한 언론인은 뉴스포털 '47뉴스'에서 "과거에도 원전에서 상당히 많은 문제가 발생했지만 그때마다 원전 담당자와 정부는 '전문가에게 맡기면 된다'고 했다"면서 "당시 나를 포함한 취재기자들은 충분한 지식이 없다는 이유로 깊이 파고 들지 못했고 '전문가에게 맡기기'에 동조했다"고 썼다.

전 국민이 모금 운동을 벌여 모은 기부금 2조3000억원도 이재민들에게 전달되지 않고 있다. 전문가 집단인 각종 위원회에서 분배 방법을 놓고 논의가 길어지면서 대부분 지급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폐 끼치기 싫다고 공익 무시

타인에게 '폐'를 끼치기 싫어하는 문화도 위기 대처능력을 떨어뜨렸다는 지적도 나온다. 하라다 히데오(原田英生) 유통경제대 교수는 "
미국은 토네이도 같은 재해가 일어나면 거주를 금지하는 등 개인의 권리도 제한한다"면서 "그러나 일본은 개인을 너무 배려하는 문화 때문에 안전과 방재를 우선하는 사상이 부족하다"고 했다.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은 최근 '위기에서 재출발: 새로운 일본으로'라는 연재 기사에서 "일본은 개인의 권리만 중요하게 취급하고 '공공의 이익'을 말하지 않기 때문에 바람직한 개혁이 늦어진다"고 지적했다.

◆"재해발생시 권력 몰아주자" 주장도

일본의 정치체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정치제도를 개혁하자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부지사는 "현재의 정치시스템으로는 누가 총리를 해도 제대로 복구작업을 할 수 없다"며 일종의 대통령제라고 할 수 있는 수상공선제(首相公選制·국민이 직접 총리를 선출) 도입을 주장했다.

개헌론도 나오고 있다. 요미우리(讀賣)신문은 "재해 발생시 총리가 전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개헌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본 정치권은 여전히 재해복구보다 정쟁에 몰두하고 있다. 야당은 물론 여당 비주류 의원들도
간 나오토 총리가 사퇴해야 재해 복구에 협력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러다 보니 다시 관료주의로 회귀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강상중 도쿄대 교수는 "민주당 정부가 정치주도를 내세우자 관료들이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며 "원전 사고가 조기에 수습되지 않으면 일본은 다시 과거의 관료주의 국가로 되돌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도쿄=차학봉 특파원 hbcha@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