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

제비집 흥정

부산갈매기88 2012. 5. 15. 16:18

 

새 단장 우리 집, 제비 돌아오자 야박하게 빗자루로 쫓아낸 아내
샐쭉 웃으며 내게 '임대료' 요구 '이제 제비 똥은 알아서 청소하소'
눈치 빠른 제비, 곧장 둥지 틀어 어수룩한 흥정 뒤에 찾아온 평화

박기옥 자영업·경북 경산시 와촌면
지저귀는 새 소리가 새벽잠을 깨운다. 아침이슬처럼 영롱하다. 소나무 가지 위에선 참새가 재잘거리며 까불고, 전깃줄에는 제비 한 쌍이 지지배배 노래한다. 작년 가을에 강남 갔던 그들이 돌아왔다. 삼월 삼짇날이 지났는데도 기척이 없어 기다리던 참이었다. 반가워 손을 흔드니, 주억주억 고개를 까닥인다.

숨가쁜 날갯짓으로 지붕 아래를 선회하며 옛집의 안녕을 묻는다. 지난해 둥지는 허름한 슬레이트 처마 밑이었다. 살던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대신 리모델링으로 처마가 매끈하게 변했으니 당황해하는 모습이다. 정들었던 주인과 옛집을 잊지 않고 찾아주니 가슴이 뿌듯하다. 그러나 반가움도 잠시뿐 아내의 소프라노 목소리가 새벽 공기를 가른다.

"이놈의 제비 새끼, 가져오라는 박씨는커녕 똥만 갈기 뿌리네." 대나무 빗자루를 휘적이며 쫓아내고 있다.

얼마나 황당했을까. 반기지는 못할망정 문전박대를 당했으니. 제비는 실망을 안고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서러움에 눈물 젖어 발길을 돌리지 않았으랴. 며칠 동안 고샅을 돌아봐도 그림자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옛정을 못 잊어 찾아온 산 짐승을 배설물을 핑계 삼아 매몰차게 내치다니, 아내의 짓거리가 야속하고 미웠다. 하지만 그들의 의리를 익히 알고 있었던 터라 '언젠가는 돌아오겠지'라고 굳게 믿었다. 그날을 대비하여 아내의 마음을 돌려놓는 것이 급선무였다. 사전 포석으로 심리전에 들어갔다.

"당신의 학대로 제비가 날아가 버렸으니 내 재미도 날아가 버렸네. 모든 일에 의욕도 없어지고…." 그렇게 내뱉고는 눈인사도 외면한 채 휑하니 출근을 해버리곤 했다.

나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열흘쯤 지난 어느 날 제비가 돌아왔다는 아내의 들뜬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울렸다. 풀죽은 나에게 위로가 담긴 전화임을 안다. 하찮은 짐승 때문에 늘어진 남편의 어깻죽지가 안쓰러웠을 것이고, 내 작전에 말려들었음이 분명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다시 온 제비도 행동으로 내 편이 되고 있었다. 위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아래채에 보금자리를 살핀다. '리모델링으로 단장된 큰 채에는 받아주지 않을 것'이라는 안주인의 뜻을 읽은 모양이다. 지난해 식구가 늘어난 제비가 집을 확장하려고 했을 때 아내는 짓는 족족 부숴댔다. 현실 감각이 뛰어난 그들이 삼박하게 뜻을 접고 살던 집을 넓히는 영리함에 나도 아내도 탄복하지 않았던가. '헌 집을 부수고 새집을 지어 살자'고 고집하던 아내의 마음을 돌리게 한 일등공신이었다. 계속 자기 집을 리모델링하는 제비는 '있는 집을 리모델링해서 쓰자'고 했던 내 주장이 먹혀들어가는 데 큰 도움이 됐던 것이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이 같은 영물(靈物)을 한낱 미물(微物)로 대접할 수 있을까. 그들이 돌아오자 생기가 돋아난 내 앞에서 아내는 보란 듯이 후여후여 팔을 휘젓는다. 시늉은 하지만 힘을 뺀 형식적인 몸짓이다. 나에게 눈치를 보내면서 무언가를 주문하고 있다. 짐짓 모르는 채 딴전을 피웠더니 바로 노골적으로 나온다. 동그라미를 그린 손가락을 연방 코앞에 밀었다 당겼다 하는가 하면, 샐쭉샐쭉 묘한 웃음을 흘린다.

'아이고 밉살스러운 여우, 제비집을 짓는 조건으로 흥정을 걸어올 모양이구나. 작년에도 이 문제로 재미를 쏠쏠하게 보더니…. 처음부터 밀리면 안 되는데.'

장사 30년에 산전수전 겪은 경험이면 아내의 마음을 읽는 것쯤은 누워서 떡 먹기다. 제비집을 부수지 않을 것이라는 정도는 알지만,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금일봉을 제공하며 수월하게 흥정에 응하고 말았다.

"앞으로 제비 똥은 내 눈앞에 안 보이도록 알아서 청소하소"라며 조건을 하나 더 붙인다. 영국 신사처럼 매끈하고 영리한 놈이 하필 똥오줌은 가리지는 못하는지. 비록 타협은 끝났지만, 그것을 꼬투리로 틈만 나면 내 지갑을 엿볼 것을 생각하니 얄밉기 그지없다. 뻔히 내다보면서도 헤프게 말을 뱉은 가벼움과 허술한 내 협상력에 씁쓰레한 웃음이 입술에 물린다.

우리 부부의 거래가 매듭지어진 것을 알아차렸는지 제비 부부의 집짓기 공사는 속도가 붙었다. 페인트의 접착력을 높이기 위하여 먼저 촉진제를 바르듯 기초공사는 튼튼했다. 묽게 반죽한 검불을 바르고, 충분히 말린 다음 본공사에 들어가는 것을 볼 때 부실공사를 밥먹듯 하는 인간에게 경종을 울린다. 부부가 부지런히 힘을 합해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솜씨는 일류 목수를 뺨친다.

지금 제비는 알을 품고 있다. 모두가 탈 없이 껍질을 깨고 고고지성(呱呱之聲)을 터뜨리기를 바라는 마음이 절실하리라. 약 보름 동안 침입자를 경계하며 산고(産苦)를 치르는 모성애는 높고도 크다. 며칠 뒤면 노란 입을 짝짝 벌리는 새 생명을 볼 수 있을까 가슴이 설렌다. 장난기 섞인 아내가 빗자루로 휘저어도 둥지에서 옴짝달싹하지 않는다. 안주인의 이런저런 속마음을 벌써 눈치를 챈 양 쪽 째진 눈 속에 깨알 같은 눈동자가 마냥 평화롭다. 가끔은 이렇게 경제원칙과 어긋난 어수룩한 흥정도 괜찮을 성싶다.

 

<조선일보/박기옥 자영업·경북 경산시 와촌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