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이야기

'변호사 시험 합격' 평범했던 50세 주부가 만든 감동 드라마

부산갈매기88 2012. 8. 13. 06:41

50세의 평범한 주부가 로스쿨 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제1회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부친 사망, 갑상선 수술을 딛고 변호사가 된 권남인 씨(50)의 감동적인 도전기를 들어보았다.

대법원 맞은편 멋진 스카이뷰를 자랑하는 법무법인 청신. 깔끔한 정장 차림에 뿔테 안경을 쓴 권남인 변호사가 이근윤 대표 변호사와 함께 환한 얼굴로 기자를 맞았다.
“비가 많이 오지요? 이런 날엔 회의실 전망이 더 좋아요.”

지난 3월 말 첫 출근 해서 6개월 연수과정을 밟고 있는 권 변호사. 제법 법조인 분위기가 났다. 하지만 3년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고등학생 자녀 두 명을 둔 전업주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 법전 한 번 본 적 없던 그녀에게 불현듯 남편이 “서점에서 가져왔다”며 로스쿨 입학안내 브로셔 한 장을 건넸다.

“웬 로스쿨?” 코웃음을 쳤지만, 가슴이 뛰었다. 그리고 나이 쉰, 아주머니가 아닌 ‘권 변호사’로서 화려한 인생 2막을 걷어 올렸다.

난생처음 본 토익, 두 달 만에 950!
권 변호사는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했고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하지만 결혼과 더불어 육아로 삶의 중심을 옮기면서 펜대를 놓은 지 20여 년이 흘렀다. 그 와중에도 영어 감각만은 잃고 싶지 않아 파트타임으로 영어 강사와 과외교사 일을 병행했다. 로스쿨 입학요건 중 영어는 중요한 평가기준이 된다.

“토익이나 토플 영어점수가 필요했는데, 제 학창시절에는 그런 시험이 존재하지도 않았거든요. 무작정 학원에 등록해서 가장 가까운 시기의 토익시험 3번을 연달아 신청했죠.”

보름 만에 도전한 생애 첫 토익시험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820점. 이어 두 달간 점수 올리기에 매진했고 920점, 950점으로 껑충 뛰었다. 법학적성시험(LEET) 준비도 해야 했다. 하지만 로스쿨 1기인 터라 정보가 있을 리 만무했다. 다행히 과거 GRE(Graduate Record Examination, 미국 대학원 입학능력시험) 공부를 했던 경험을 살려 논리추론 문제 공부를 시작했고, 어렵게만 느껴지던 논술도 나날이 실력이 향상되면서 자신감이 붙었다.

“반년 정도 바짝 준비해서 시험을 쳤고, 전남대 로스쿨에 좋은 성적으로 합격해 장학금까지 받게 됐는데, 막상 합격통보를 받고 나니까 얼떨떨한 거예요. 결정을 내리지 못하겠더라고요. 아이들 문제, 집안 살림 문제 등 현실적인 문제도 걱정됐지만 무엇보다 법에 대해 전혀 모르는 제가 다시 방대한 양의 공부를 소화할 수 있을지…. 용기가 나지 않았죠.”

부친 별세, 갑상선 수술, 수험생 뒷바라지까지

결국 굳게 마음먹고 로스쿨에 들어갔지만 현실은 더 가혹했다. 서울에 남겨둔 남편과 두 자녀가 걱정된 권 변호사는 주말마다 광주에서 서울행 버스에 올랐다. 일주일간 밀린 살림을 하루 만에 정리하고 다시 내려와 학생으로 돌아온 후엔 절대적으로 부족한 학습시간을 메워야 한다는 조바심에 24시간 개방하는 독서실에 머물며 단 하루도 세 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었다. 그러던 중 폐암으로 병상에 계시던 아버지가 세 번의 수술 끝에 눈을 감으셨다. 2학년 중간고사 기간이었다.

“시험을 두 과목 못 봤어요. 리포트로 대체했죠. 장례를 치르고 다시 학교로 돌아오는데…. 당시 마음은 뭐라 설명할 수가 없네요. 제가 맏딸이거든요.”

씩씩하던 권 변호사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붉어진 눈시울과 함께.

다음 해인 3학년 때에는 갑상선 종양 수술을 받았다. 정기검진을 받던 중 부갑상선에 자라고 있는 종양을 우연히 발견했고, 방치할 경우 신장에 결석이 생겨 축적될 수 있다는 의사의 소견에 따라 곧장 수술을 받았다.

“수술을 포함해 일주일간 입원하고 나서 바로 학교로 돌아갔어요. 어떤 일로도 공부를 지체할 수는 없다고 자신을 다그쳤죠.”

첫째 딸이 고3일 때 시작한 로스쿨 생활은 졸업반일 무렵 둘째 아들마저 고3이 되는 기막힌 타이밍 때문에 죄책감까지 생겼다.

“작은아이가 고3인 데다 주말마다 집에 내려가 엉망이 된 살림을 수습하면서 ‘내가 지금 뭐 하는 건가…’ 싶었죠. 한번은 교내 기도 모임에 나갔는데, 딸 또래 되는 학우들 앞에서 이런 얘기를 털어놓으며 대성통곡한 적도 있어요.”

아픔을 딛게 해준 가족
어머니는 여자보다 강하다지만, 그저 악으로 깡으로 버티기에는 너무도 혹독한 시간들이었다. 돌이켜보면 극한의 긴장 속에서 계속 버텨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주저앉기보다는 이겨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권 변호사는 가족을 생각하며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극복해냈다.

“어린 학우들은 반드시 지켜야 할 게 없잖아요. 하지만 저에겐 소중한 가정이 있었죠. 세상에서 제~일 멋진 우리 남편, 듬직한 큰딸, 사근사근한 아들까지. 사실 제가 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 덕분이에요. 시험기간에 제가 서울로 올라가는 게 힘들까 봐 아이들을 데리고 광주로 내려와서 밥 한 끼 먹고 웃으며 돌아갔어요. 제 남편이 좀 멋져요.”
무엇보다 그녀를 뿌듯하게 만드는 건 식구들이 그녀를 자랑스러워한다는 사실. 얼마 전 아들과 쇼핑을 하는데, 다정한 모자의 모습에 점원이 부러워하며 “엄마가 공부하란 말 안 하시니?”라고 묻자 아들이 “아뇨, 저희 엄마는 공부를 해보셔서 안 그러세요. 변호사시거든요.”라고 당당하게 말했단다.

‘여보’라는 호칭 대신 “권변!”이라고 부르는 남편의 새로운 애칭도 싫지 않다.
“남편은 변호사라는 직업 자체에 어떤 대단한 권위가 있어서 그렇게 부르는 것이 아니에요. 제가 힘들게 노력해서 얻은 타이틀인 걸 아니까요. 저 정말 수고 많이 했거든요….”

앞으로 일하는 여성들의 법적 권리를 찾아줄 수 있는 법재단 ‘레걸 헬프 포 워킹맘(Legal Help For Working Woman)’을 설립하고 싶다는 권 변호사. 여성뿐 아니라 아동과 노인 등 사회적 약자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고, 심리학 전공을 살려 정신적인 치유의 영역까지 다가서고 싶다는 포부다. 그녀에게 ‘쉰’이란 나이는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아 보였다.

“이제 시작이에요. 앞으로 30년을 생각하고 3년을 투자했거든요. 50대 초반에는 변호사로서 자리를 잡고, 후반에는 워킹맘 재단활동을 열심히 할 거예요. 60대에는 입법활동도 꿈꾸고 있어요. 그리고 70대에는 여러 가지 대외활동을 하면서 후배들에게 물려줄 준비를 해야겠죠?(웃음)”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