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

혼전계약서에.....

부산갈매기88 2014. 3. 6. 11:40

얼마 전 변호사 사무실로 훤칠한 청년이 찾아왔다. 대기업 오너 2세였다. 그는 대뜸 “혼전계약서 한 부만 작성해달라”고 했다. 아직 혼전계약서는 우리나라에선 드문 일. 그의 설명은 이랬다.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는데, 부모의 반대가 심했다. 평범한 집안이라는 이유였다.

부모를 설득해 겨우 결혼을 허락받았는데, 조건이 하나 붙었다. 나중에 이혼하더라도 며느리가 재산을 하나도 가져갈 수 없게 혼전계약서를 만들라는 것. “그게 없으면 결혼은 절대 안 된다”고 부모는 못을 박았다. 이혼에 따른 거액의 위자료와 재산 분할 액수가 걱정이 된 것이다. 어디서 그런 얘기를 들었는지 청년도 혼전계약서만 작성하면 이혼 해도 재산을 지킬 수 있다고 알고 있었다.

대기업 오너 2세, 평범한 집안 출신 여자와의 결혼 겨우 허락받았는데
부모, “이혼 해도 며느리가 재산 하나도 못가져가게 혼전계약서 만들라”요구

물론 결혼 전의 재산이나 결혼 이후 부모에게서 받은 재산은 특유재산이라고 하여 재산분할 대상에서 제외될 수도 있지만, 혼인 기간이 일정기간 지속되고 아내가 자녀까지 출산하면 적어도 아내에게 10~20%정도의 재산분할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 현재 법원의 실무이다. 천문학적인 액수의 재산이 있는 집안에서는 10%정도의 재산분할만 계산해도 어마어마한 금액이 될 수 있다. 부모는 아들이 이혼할 경우 그 재산이 며느리에게 가는 것이 걱정이 된 것이다. 그리고 단순히 집안 재산 문제를 넘어 아들이 기업 주식을 소유할 경우 기업 경영권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판단한 듯했다.

혼전계약서도 원칙적으로는 계약이므로 일정 요건이 충족되면 효력이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내용이 현저히 불공정하거나 강압에 의해 작성된 경우에는 전부나 일부분이 무효가 될 수 있다. 예컨대 이혼할 경우 한 푼도 줄 수 없다는 혼전계약서는 불공정한 내용이어서 무효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혼해도 한 푼도 줄 수 없다’는 혼전계약서는 무효가 될 수 있어

상황을 설명했더니 청년은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했다. 답답한 듯한 눈치였다. 나는 조금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결혼 전에 남자가 원래 갖고 있던 재산은 특유재산이고 여자의 기여도가 없으니 그 부분은 이혼을 해도 각자의 재산으로 해 상대방에게 재산분할을 청구할 수 없도록 하고, 다만 결혼한 이후에 형성되거나 증가된 재산에 대해서만 나누는 것으로 한다면 유효할 수 있다”고 말해줬다. 청년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부모와 상의를 하고 다시 오겠다고 했다. 그 여자를 무척 사랑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오지 않았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혼전계약서는 생소한 개념이었다. “그렇게 서로를 믿지 못하면서 어떻게 결혼을 하느냐”는 부정적인 인식이 깔려 있었다. 그런데 최근엔 일부 부유층과 연예인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들도 많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얼마 전 한 결혼정보회사가 설문조사를 했더니 예비부부의 70% 정도가 혼전계약서가 필요하다고 답했다고 한다. 몇 년 전 이혼한 한 유명여성의 경우 남편이 상당한 재력가 집안이었지만 막상 이혼할 때 위자료와 재산분할을 많이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이유를 놓고 말들이 많았는데, 내 생각엔 그 부부도 혼전계약서를 작성했을 가능성이 크다.

민법에 있는 혼전계약서 조항

그럼 우리 법은 어떻게 돼 있을까. 민법에 혼전계약서에 관한 조항이 있다. ‘부부재산계약’이 혼전계약과 비슷한 개념이다. 부부재산계약이란 혼인성립 전에 부부가 혼인 중의 재산에 대해 체결하는 계약을 말한다(민법 제829조). 혼인 전의 재산에 관해 약정을 한 경우에는 혼인 중 이를 변경하지 못한다. 다만 정당한 사유가 있을 때에 한해 법원 허가를 얻어 변경할 수 있도록 돼 있다.

혼전계약서에는 이혼을 전제로 한 재산문제 뿐 아니라 여러 가지 내용을 담을 수 있다. 혼인 기간 중 서로가 지켜야할 규칙은 물론 경제적인 문제, 스킨십 문제, 가사분배, 자녀양육 등 여러 가지 내용이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혼전계약서에 어떠한 내용이 들어가도 다 유효한 것은 아니다. 선량한 풍속이나 사회질서에 위반하는 내용이 담기면 무효가 될 수 있다(민법 103조). 예컨대 이중결혼을 인정하는 내용이나 상대방 신체의 자유를 억압하는 내용은 무효가 될 수 있다. 사기나 강박에 의한 경우도 마찬가지다.

미국에선 혼전계약서(Pre-nuptial Agreements)가 널리 이용되고 있다. 할리우드 스타들에게도 흔히 있다. 영화 ‘원초적 본능’으로 유명한 마이클 더글라스와 캐서린 제타 존스의 경우 결혼 조건으로 캐서린 제타 존스는 결혼일에 2000만 달러를 받고, '남편이 외도할 경우' 500만 달러를 받기로 계약했다고 한다.

할리우드 스타들이 애용하는 혼전계약서
억만장자 도널드 트럼프는 성공법칙 10가지 중 하나로 혼전계약서 꼽아

톰 크루즈와 케이티 홈즈도 혼전계약서를 작성한 것으로 전해진다. 톰 크루즈는 이미 전 부인 니콜 키드만과 이혼한 경험이 있는 만큼 혼전계약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미국 부자에게 혼전계약서 작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억만장자로 유명한 도널드 트럼프의 자서전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성공법칙 10가지 중 하나로 '혼전계약서 작성'을 꼽기도 했다.


미국 부자들이 혼전계약서를 쓰는 가장 큰 이유는 이혼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수백억대 자산가도 이혼을 하면 재산의 절반가량을 부인에게 주어야 하는데 결혼과 이혼을 여러 번 반복하다보면 상당수 재산이 이혼 위자료나 재산분할로 날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혼 특히 재혼의 경우 혼전계약서를 많이 작성하고 있다.

미국 헤지펀드의 제왕 소로스는 이혼을 하면서 부인과 재산분할로 8000만달러를 주고 합의했다. 반면 GE의 전 회장인 잭 웰치는 부인에게 무려 1억8000만달러를 재산분할로 지급했다고 한다. 웰치보다 훨씬 부자이고 결혼생활 기간도 긴 소로스가 웰치보다 적은 금액을 지급한 이유는 바로 혼전계약서를 유리하게 작성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혼전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으면 거의 모든 주(州)가 이혼할 때는 재산의 50%씩 나눠야 하지만, 혼전계약서를 작성한 경우 그에 근거해서 재산을 나누게 된다. 예컨대 ‘혼인 전의 재산은 각자의 소유로 하고, 혼인 이후 늘어난 재산만 나눈다’고 계약하면 재산의 상당부분을 지킬 수 있다.

“이제 우리도 혼전계약서 작성에 대한 인식 바꿔야”

나는 혼인 전이나 혼인 이후에도 부부간에 계약서나 이에 준하는 서면을 작성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계약은 당사자 사이의 약속이다. 그런데 같은 약속이라도 단지 말로 한 것과 서면으로 증거를 남긴 것은 그 느낌과 효력이 다르다. 만약 법적 분쟁까지 가게 된다면 말로만 남긴 약속은 없는 약속이나 마찬가지다.

이제는 우리나라도 혼전계약서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혼전계약서는 상대방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서로에 대한 약속을 확인하고 만약에 발생할 수 있는 분쟁에 대비해 미리 작성하는 일종의 ‘안전장치’라고 생각했으면 한다. 다만 그 내용이 불공정해선 안된다. 결혼 전의 각자 재산은 청구할 수 없게 하더라도 최소한 혼인 이후의 재산은 반반씩 나누는 내용이면 좋을 듯하다. 아내를 사랑한다면 아내에게 재산의 절반을 줄 수도 있다는 혼전계약서를 쓰는 것도 멋진 결혼선물이라 생각한다.
<조선일보/2014. 3. 6일자, 이인철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