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 월성계곡 상류의 사선암. 암반을 타고 흘러내린 물이 고이고 굽이치는 가운데, 물길 한옆에 사선대(송암)가 탑처럼 솟아 있다. 가뭄으로 수량은 적다.
거창 월성계곡 상류의 사선암. 암반을 타고 흘러내린 물이 고이고 굽이치는 가운데, 물길 한옆에 사선대(송암)가 탑처럼 솟아 있다. 가뭄으로 수량은 적다.
[매거진 esc] 여행
경남 거창 금원산·함양 남덕유산 자락 계곡 탐방…선인 발자취 서린 정자 구경도 별맛
오뉴월은 계곡 여행에 알맞은 시기다. 신록은 우거질 대로 우거지고, 암반 타고 흐르는 물은 차고도 맑은데 인적은 비교적 뜸하다. 산 좋아하고 물 좋아한 우리 선인들도 오뉴월 계곡 여행을 즐겼다. 바위계곡 내리뻗고 폭포 물줄기 흩어지는 곳마다 정자 짓고 글귀 새기며 족적을 남겼다.

경남 서북부 끝자락 거창·함양 일대의 산길·물길에도 선인들 발자취가 즐비하다. 덕유산 남쪽 줄기 금원산 자락과 주변의 깨끗한 골짜기들이 품은 옛 정자들과 크고 작은 폭포들을 만나고 왔다. 한 시절 나대며 살던 고관대작도, 은둔해 유유자적하던 선비도 앞다퉈 탐방하며 자연을 즐기던 곳이다. 물길을 따라가면 읊고 마시던 선비들 행각이 드러나고, 선비들 발자취를 뒤적이면 그 물길의 최고 경관이 펼쳐진다. 오랜 가뭄에도 아랑곳없이 상류 쪽으론 깨끗한 물길과 수량 풍부한 폭포들이 이어진다. 바위 자락에 날아갈듯 올라앉은 정자 바라보며 시린 물살에 발을 담그고 쉬어가기 좋은 곳들이다.

함양 용추계곡 용추폭포 들머리에 있는 옛 장수사 조계문(일주문·1702년 건립) 기둥.
함양 용추계곡 용추폭포 들머리에 있는 옛 장수사 조계문(일주문·1702년 건립) 기둥.

물길 따라 옛 선비 머물다 간 흔적 빼곡

덕유산 남쪽, 함양군 북부 안의면 일대와 거창군 서부 마리·위천면 지역은 조선말까지 안의현(안음현)에 속했던 곳이다. 바위 자락을 타고 흐르는 계곡이 즐비해 선인들은 이 지역 곳곳에 정자를 짓고 경관을 즐겼다. 낙동강 물줄기인 남강의 상류 지역이다. 특히 이 일대에서도 경관이 빼어난 세 곳을 ‘안의삼동’(안의현의 3대 동천)으로 부르며 탐방을 즐겼다. 농월정 등 정자가 아름다운 화림동과 용추폭포가 있는 심진동, 그리고 수승대 경관으로 이름난 원학동이 그곳이다. 함양 남덕유산 남쪽 자락(화림동)과 거창 금원산 자락(원학동), 그리고 그 사이쯤에 자리한(심진동) ‘동천’(경관 빼어난 골짜기)들이다.(최석기 지음 <조선 선비들의 답사일번지 원학동> 참조)

산 타기 좋아하는 이들이야, 계곡 따라 오르내리는 다양한 코스의 산행을 즐기며 금원산·거망산 일대 명소들을 찾겠지만, 가족여행자라면 차를 몰고 이동하며 옛 원학동 주변의 골짜기 물길과 정자들을 둘러보는 1박2일 여행 일정을 짜볼 만하다.

선인들 시문과 이름이 빼곡히 새겨진 수승대(오른쪽 부분).
선인들 시문과 이름이 빼곡히 새겨진 수승대(오른쪽 부분).
금원산자연휴양림 계곡의 유안청 제1폭포.
금원산자연휴양림 계곡의 유안청 제1폭포.
이 일대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경관이 거창 위천면 위천 물길의 수승대다. 월성계곡과 유안청계곡 탐방의 길목에 자리잡은 명승이다. 물길 가운데 거북을 닮은 거대한 바위섬을 가리키는데, 이를 칭송하는 시문과 선비들의 이름이 바위에 빼곡히 새겨져 있다. 새긴 이름 중 가장 많은 것이 주변 마을에 세거해 살던 신씨·임씨 이름들로, 퇴계 이황과 교유하던 학자 임훈과 신권의 후손들이다. 퇴계는 본디 ‘수송대’라 부르던 이 거북바위 이름을 ‘수승대’로 바꾼 인물이다. 수송대는 신라와 백제가 사신(또는 중국 사신)을 전송하던 장소에서 유래했다고 전한다. 직접 와보지도 않고 오래된 명승 이름을 마음대로 바꿨으니 당시 퇴계의 권세를 짐작해볼 수 있다. 신권은 개명을 환영했지만, 임훈은 옛 이름 바꾸는 것을 마땅찮게 여겼다고 한다.

 

‘소금강’으로도 불린 월성계곡의 바위경치

월성계곡은 남덕유산에서 흘러내려 거창 북상면소재지까지 이어지는 12㎞ 길이의 물길을 말한다. 거대한 암반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길이, 용암정·강선대·분설암·사선대 등 빼어난 경치와 정자들을 곳곳에 품고 있다. 북상면소재지에서 황점마을까지 37번 도로를 타고 물길 따라 오르며 크고 작은 소와 바위 경치, 정자들을 감상할 수 있다.

북상면소재지 부근 위천변의 정자 용암정은 주변 물길의 바위 경치가 탄성을 자아내는 곳이다. 하류 지역인데다 가뭄이 이어져 물빛은 맑지 않으나 암반을 타고 흐르는 물길에 펼쳐진 거대한 바위들이 ‘명승’으로 지정된 이유를 설명해준다. 상류로 오르면서 월성계곡 물길은 차츰 깨끗해진다. 보기 좋기로는 월성마을 물길의 바위 경치 사선대(송대)다. 여러개의 커다란 바윗덩이를 쌓아올린 듯 우뚝 솟은 바위와 암반을 타고 굽이쳐 흐르는 물길이 아름답다. 남명 조식, 동춘당 송준길 등이 여기서 소요했다고 전해온다. 바위 밑에 조선말 경상도관찰사 김양순이 썼다는 ‘사선대’ 각자가 있다.

월성계곡 상류 황점마을엔 을사늑약 때 처절한 의병투쟁을 펼쳤던 박화기·박수기·박민기 삼형제의 항일정신을 기리는 사적비가 있다. 사적비 내용을 읽어볼 만하다. 최고미라는 친일 첩자의 밀고로 삼형제가 희생되는 과정이 아프게 기록돼 있다.

금원산 유안청 계곡
빨치산 500명 목욕했다고
소설 <남부군>서 묘사한 곳
용추계곡엔 15m 높이 폭포
암반 타고 이어진 물웅덩이들도 볼만

 

금원산휴양림 유안청계곡에도 볼거리 즐비

위천면소재지에서 금원산휴양림으로 오르면 울창한 숲과 깨끗한 물길, 그리고 아담한 폭포들이 이어지는 유안청계곡에 이른다. 마을 유생들이 공부하던 유안청이 있었던 곳이라는데, 유안청폭포의 본디 이름은 ‘가섭동폭’이다. 소설 <남부군>에서 빨치산 500명이 목욕했다고 묘사된 곳이다. 유안청 제2폭포는 길고 완만한 바위 자락을 물살이 빠르게 미끄러져 내려가는 와폭이고, 제1폭포는 비스듬히 걸린 비교적 경사진 폭포다. 아담한 자운폭포 거쳐 유안청 제2·제1폭포까지 계곡 탐방도 해볼 만하지만, 곁가지 계곡인 지재미계곡에도 볼거리가 있다.

휴양림관리소 앞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오르면 물길 옆에 거대한 바윗덩어리 하나가 보인다. 옛 암자 가섭암의 일주문 구실을 했다는 문바위다. 3~4층 건물 크기로, 단일 바윗덩어리로는 국내 최대 규모라고 한다. 이 바위 너머 산자락에 18세기 후반까지 있었다는 가섭암 터가 있다. 암자처럼 보이는 작은 집이 한채 들어서 있는데, 집 뒤 산비탈에 거대한 바위들이 포개져 이룬 동굴이 있다.

동굴 안 벽면에 새겨진 ‘가섭암지마애삼존불상’(보물)이 눈부시다. 정교한 선각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아름다운 고려시대 조각 작품이다. 동굴로 스며드는 빛이 신령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거창~함양 물길 따라 정자 탐방 해볼만

금원산 서쪽 함양 땅 옛 심진동엔 용추폭포로 이름난 용추계곡과 용추자연휴양림이 있고, 남덕유산 자락에서 발원한 남강 상류 물길(옛 화림동계곡)엔 거연정·동호정 등 옛 정자들이 즐비하다. 앞서 월성계곡 끝 황점마을 못미처 월성마을에서 왼쪽 내계마을로 들어서면, 좁은 시멘트길이 내계폭포 쪽으로 이어진다. 어둑한 숲 안 바위에 걸린 내계폭포(제1·2폭포)는, 크기도 모습도 아담한 형태다. 내계폭포 지나 거창 쪽 금원산과 함양 쪽 월봉산 사이에 걸린 수망령을 넘어 내려가면 용추계곡이다. 계곡을 따라 내려가며, 검푸르고 널찍한 소로 떨어지는 15m 높이의 용추폭포와 용소·꺽지소·요강소 등 멋진 암반을 타고 이어지는 크고 작은 물웅덩이들을 감상할 수 있다. 계곡 하류 안심마을(물레방아 떡마을)은 조선말 안의현감을 지낸 연암 박지원이 물레방아를 설치했었다는 마을이다.

안의면소재지에서 남강 상류 물줄기 따라 육십령 쪽으로 오르면, 농월정 터(2003년 불타 현재 복원공사가 진행중이다)와 동호정·군자정·거연정 등 정자들이 차례로 나타난다. 크기와 유래는 달라도, 거대한 바위 위에 올라앉은 모습이 한결같고, 감상할 만한 물길과 바위 경치가 펼쳐진 것 또한 매한가지다. 가뭄 탓에 물빛은 좋지 않다.

 

 <한계레신문 2015. 6.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