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방

시골마을 고추따기 해주는 교회 청년들 본 스님의 깨달음

부산갈매기88 2017. 10. 25. 08:00

시골 마을서 고추 따기 봉사하고 심심풀이 화투 치는 어르신 위해 10원짜리 동전 바꿔놓는 교회
이웃 종교의 실천 눈여겨보라는 불교계 내부의 목소리 경청해야

'고추 따기 해주는 교회'. 지난 9월 불교 조계종 기관지 '불교신문'에 실린 칼럼 제목이다. 충남 보령 세원사 주지 정운 스님의 글이다. 스님이 사는 동네 교회가 주민들을 위해 고추 따기 봉사를 한 이야기다.

어느 날 저녁 공양 후 마을 산책에 나선 스님의 눈에 못 보던 현수막 하나가 들어왔다. 이 마을 교회와 수원의 한 교회가 주관해 광복절 날 마을회관에서 마을잔치와 머리 염색, 네일아트 그리고 고추 따기를 해준다는 내용이었다. 광복절 전날 대형 버스를 타고 온 젊은이들이 집집마다 간식과 전도지(傳道紙), 성경을 쇼핑백에 담아 나눠주곤 저녁 식사를 대접했다. 이튿날 마을회관엔 염색, 네일아트 하려는 할아버지 할머니들로 넘쳐났다. 스님은 "이틀 동안 마을 안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고 썼다. 스님은 자신의 휴가를 아낌없이 내놓는 교회 청년들의 마음, 작은 시골 교회와 도시 교회가 힘을 모으는 모습 등에서 감동과 부러움, 교훈을 느낀 것 같다.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마을 주민과 함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찾아봐야겠다는 마음이 급해지고 있다" "올여름, 이웃 종교를 통해 휴가에 대한 또 하나의 깨달음을 얻게 됐다"고 썼다.

불교 천태종이 내는 잡지 '금강'엔 '칼갈이 선교'란 글도 실렸다. 재가자(在家者)인 금강신문 기자가 쓴 칼럼이다. 벌써 수년째 한 달에 한 번꼴로 토요일 아침,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50세대 한정, 세대당 두 자루까지 무료로 칼갈이 서비스를 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와 궁금했는데 사정을 알고 보니 지역 교회가 벌이는 봉사였다는 것. 글쓴이는 고향의 어머니 이야기도 보탰다. 고향 마을 인근 교회가 때때로 종교 구분 없이 어르신들에게 갈비탕 대접하고 관광 보내드리고, 심지어 어르신들이 경로당에서 심심풀이 화투 치는 10원, 100원짜리 동전까지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평생 절에만 다니던 그의 어머니는 요즘은 교회에도 다니는 '양다리 신자'가 됐다고 한다.

불교신문엔 지난 7월 '노거사님의 꾸짖음'이란 칼럼도 실렸다. 경남 거창 죽림정사 일광 스님이 쓴 글이다. 어느 이른 아침 걸려온 할아버지 신자의 '전화 호통' 에피소드를 적은 것이다. "우리 할멈이 며칠 전 세상을 떠났어요. 평생 부처님 믿고 스님 의지하며 살았는데, 아니, 나오던 신도가 2년 동안이나 안 보이고 기별 없으면 전화라도 한번 줘야 하는 거 아니오?" 할머니가 2년간 병상에 있는 동안 문병 한번 없고, 장례 치르고 기다려도 절에서 아무 연락이 없지만 그래도 할머니 49재를 지내려고 전화했다는 것이다. 잠시 후 스님이 다시 전화를 드려 사과하고 위로하니 할아버지는 "집사람이 스님 염불 소리를 그렇게 좋아했다"며 울먹이셨단다.

이 이야기들은 요즘 돌아가는 '밑바닥 불심(佛心)'이다. 남과 비교당하기 싫어하는 건 인지상정, 종교계 역시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교계 내부에서 이런 반성, 자성의 목소리가 기관지를 통해 공개적으로 표출되고 있다. 종단 정치에는 발언권도 없는, 불교의 실핏줄이라 할 작은 사찰일수록 느끼는 위기감이 더 크다. 불교는 지난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 10년 만에 신자 300만명 감소라는 성적표를 받았다. 통계조사 방법의 오류라는 주장도 있었지만 불교계는 전반적으로 현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현장에서는 이미 변화를 체감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다음 주부터 4년 임기를 시작하는 새 조계종 총무원장 설정(雪靖) 스님의 앞에 놓인 현실은 이렇다 . 설정 스님은 수덕사 주지, 중앙종회 의장 등 사판(事判·행정)과 수덕사 방장(方丈) 등 이판(理判·수행)을 두루 경험한 70대 원로다. 불교를 둘러싼 상황의 엄중함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당선 일성(一聲)으로 '불교다운 불교, 존경받는 불교, 신심(信心) 나는 불교'를 다짐했다. 이 목표를 향한 첫걸음은 '밑바닥 불심'을 경청하는 것일지 모른다.

출처 : 조선일보 2017/1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