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이야기

서민들이 사랑했던 흙수저, 그러나 그 사랑은 짧았다. 뤼거 빈 市長

부산갈매기88 2018. 9. 20. 07:14

 

위인인가 악인인가… 논란의 뤼거 빈 市長

"뤼거 박사가 다스려야 한다. 유대인들은 죽어 없어져야 한다."

1897년 4월 20일, 새로운 시장의 취임식이 열리던 날, 빈의 거리 곳곳에서는 섬뜩한 가사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제목은 '뤼거 행진곡'. 새롭게 빈의 시장에 오른 카를 뤼거(Karl Lueger· 1844~ 1910)를 찬양하는 노래였다.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삼삼오오 거리를 누비며 목청이 터져라 노래 불렀다. 웅장한 빈시 청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청사 안은 꽉 들어찬 군중의 흥분에 찬 목소리에 귀가 멍멍할 정도였다. 멋지게 정장을 입은 카를 뤼거가 취임 연설을 위해 연단에 섰을 때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그는 자신의 열렬한 지지자들 앞에서 약속했다. '시민들의 뜻을 받들어' 자신들의 도시 빈과 조국 오스트리아의 적인 '외국인 세력'을 청산하겠다고. 그는 '외국인 세력'이 누구인지 얘기하지 않았지만 모두 알고 있었다. 그들이 유대인이란 것을. 그날 밤 뤼거의 지지자인 소상인·장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에선 밤새 축제가 열렸다. 뤼거에게 반대하는 노동자들과 전통적으로 자유주의 정당을 지지해 온 부르주아들의 거주 지역은 어둠과 침묵에 잠겼다. 빈은 완벽하게 둘로 갈렸다. 카를 뤼거가 어떤 인물이기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市政을 두고 황제와 싸우다

 

카를 뤼거(1844~1910)
카를 뤼거(1844~1910)

빈은 그 자체로 건축사 박물관이다. 19세기 중반 이후 성벽을 헐고 도시를 재개발할 때 링슈트라세를 중심으로 다양한 건축양식의 건물들을 지었다. 그 시대를 장악했던 자유주의자들은 국회의사당, 시 청사, 대학, 극장, 이 네 곳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웅장하게 지어진 것이 시 청사다. 화려한 플랑드르 고딕 양식을 따랐고 중앙에는 100m 가까운 탑을 세웠다. 지상 6층, 지하 2층의 건물 안에는 1575개의 방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건축된 시기(1872~1883년)를 생각하면 그 규모는 더욱 두드러진다. 위치 선정도 그렇다. 시청을 중심으로 앞에 극장, 오른편에 국회, 왼편에 대학을 배치했다. 자유주의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4개 기관의 한가운데에 제국의 수도인 빈의 자치(自治)를 책임질 시 청사를 놓은 것이다. 빈 시청사는 지금도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이 웅장하고 멋진 곳에 카를 뤼거가 정식으로 입성한 것은 1897년이었다. 시장에 처음 당선된 게 1895년이니 당선에서 취임까지 2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이유는 황제가 뤼거의 시장 당선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답은 '카를 뤼거는 누구인가'라는 앞의 질문에 대한 답과 같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뤼거를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반(反)유대주의를 이용하는 위험한 선동가로 봤기 때문이다. 당시 시장 선거는 시민들이 시의회 의원을 뽑고, 의원들이 시장을 선출하는 간접선거였다. 시장 선거의 마지막 절차는 황제의 승인이었는데 황제가 이 대목에서 거부권을 행사한 것이다. 제국의 수도 빈의 시장으로 '얼치기 선동가'는 안 된다는 것이 황제의 판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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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의 고딕 양식 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플랑드르 양식으로 지어진 빈의 시청사는 19세기 중반에 권력을 장악한 자유주의 세력의 자치에 대한 이상을 상징한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는 반유대주의를 세운 선동자들이, 1930년에는 나치가 이곳의 권력을 장악하면서 자유주의의 가치는 퇴색됐다. 역사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건물이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재선거가 열렸다. 다시 뤼거가 선출됐다. 황제는 다시 거부했다. 빈의 대다수 시민은 뤼거를 지지했고, 상류층과 지식인은 황제를 응원했다. 빈에서 가장 인기 있는 두 남자의 대결이었다. 그렇게 2년 동안 다섯 번의 선거가 있었고, 뤼거는 다섯 번 시장에 당선됐다! 결국 황제는 다수의 뜻에 굴복했다.

빈의 흙수저로 태어나다

시민들이 줄기차게 카를 뤼거를 지지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에게는 뤼거가 영웅이었다. 그는 빈의 낮은 계급 출신이었다. 시골에서 무작정 상경한 뤼거의 아버지는 명문 학교인 테레지아눔에서 잡역부로 일했다. 근면하고 철저했던 아버지는 직장에서 인정받았고, 폴리테크니크 대학의 관리직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뤼거의 부모는 자식 교육에 모든 열정을 쏟았다. 엄격하고 폐쇄적인 빈 사회에서 낮은 계급 출신이 성공하려면 공부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부모는 혹독하게 아들을 공부시켰다. 뤼거가 학교 갈 나이가 되자 아버지는 자신이 잡역부로 일했던 테레지아눔의 관계자들을 설득해 아들을 입학시키는 데 성공했다.

카를 뤼거 광장에 놓인 뤼거 기념동상. 그의 업적과 인기에 비해 초라하다.
카를 뤼거 광장에 놓인 뤼거 기념동상. 그의 업적과 인기에 비해 초라하다.

그렇지만 뤼거는 친구들과 숙식을 함께하지는 못했다. 기숙사 비용이 너무 비쌌기 때문이다. 학교가 끝나면 뤼거는 작은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자신을 향한 차별과 멸시를 뤼거는 타고난 긍정적인 태도와 우아함으로 넘겼다. 그리고 부모의 기대에 부응했다. 테레지아눔을 졸업한 데 이어 오스트리아 제국 최고의 명문 대학인 빈 대학의 법대에 입학한 것이다. 뤼거는 대학에서 로마법과 교회법을 전공해 박사 학위를 받았다. 25세 때였다. 법학을 전공한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뤼거는 변호사 경력을 발판으로 정계에 진출했다. 31세 때인 1875년 시의회 의원에 당선됐다. 그때 뤼거는 자유당원이었다.

빈의 市民을 사로잡고 권력을 장악하다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자유주의자들은 대부분의 시민과 유리(遊離)돼 있었다. 그들은 참정권을 제한함으로써 소수의 부르주아만을 권력 기반으로 삼았다. 스스로 낮은 계층이었던 뤼거는 달랐다. 소상공인, 장인, 노동자, 농민들이 급격한 산업화로 불안해하는 것을 이해했고, 더 많은 권리를 달라고 주장하는 것을 지지했다. 그들이 제국 전역에서 몰려오는 비(非)게르만인들을 미워하는 것도, 돈 많은 유대인들을 증오하는 것도 이해했다. 그는 빈 전체를 자신의 무대로 삼았다. 시내 중심가 커피하우스에서, 외곽의 선술집에서 뤼거는 사람들을 만나 얘기를 들었고, 기꺼이 그들의 얘기에 동조해줬다. 그는 시민들에게 빠져들었다. 그럴수록 자유주의자 뤼거는 반유대주의자로 변해갔다.

가난하고 불안한 서민들의 불만이 계속 커지자 제국 정부는 선거제도 개혁이라는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5굴덴 정도의 소액 재산세를 내는 남자들에게까지 참정권이 확대됐다. 그들 중 대부분은 뤼거의 지지자였다. 뤼거는 자유당을 탈당하고 기독교사회당을 창당했다(1891년). 그는 사회적 지위와 명성이 계속 높아지는데도 서민적인 삶을 고집했다. 시장 관저로 이사하기 전까지 미망인이 된 어머니와 두 여동생과 함께 작은 서민 아파트에서 살았다. 공동 세면대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그의 모습은 시민들에게 익숙한 광경이 됐다. 뤼거의 인기는 날로 높아졌고 개인 숭배에 가까워졌다. 이런 분위기는 처음 시장에 당선되던 1895년쯤 절정에 달했다. 그의 초상이 그려진 메달, 맥주잔 등이 등장했고, 지지자들은 그를 기리는 노래를 주고, 여성 지지자들은 집회에서 그에게 꽃을 던졌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에 맞먹는 인기였다.

빛과 어둠을 함께 남기다

빈 시청 위치 지도

인기를 바탕으로 뤼거는 황제를 굴복시키고 시장에 취임했다. 뤼거는 황제의 우려처럼 '반유대주의 선동가'였을까? 반(半)은 맞고, 반은 틀린다. 그는 선동가인 동시에 유능한 행정가였고, 행동하는 정치인이었다. 서민들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도 잘 알았다. 뤼거는 행동했다. 가스·전기 같은 주요 공익사업을 공영화해 개선했고 효율이 낮은 교통시설은 민영화했다. 상수도 사업은 그의 역점 사업이었다. 인구가 급증하면서 물 수요도 늘었는데도 제2저수조 건설 계획은 30년째 답보 상태였다. 뤼거는 직접 산으로 들어가 수원지를 찾아냈고 동료들의 반대에도 160㎞에 이르는 수도교를 건설했다. 그의 모든 정책은 빈 시민들의 더 나은 삶에 맞춰져 있었다. 그의 인기는 계속 높아져 황제를 능가했다.

뤼거는 혁신적인 건축가 오토 바그너에게 설계를 맡겨 수많은 명물을 탄생시켰다. 우정저축은행과 중앙묘지 내의 카를 뤼거 기념교회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그를 기리는 것은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카를 뤼거 기념공원 내의 동상 정도다. 업적에 비해 초라하다. 그가 표를 얻기 위해 이용했던 반유대주의가 히틀러에게 계승됐기 때문이다. 주변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동상을 바라보면 마음이 착잡하다. 사람들은 무심히 동상 옆을 스쳐 지나갈 뿐, 눈길 주는 이조차 없다.

뤼거는 장점과 업적이 많았지만 절제와 상식이 부족했다. 그는 시민을 이끌지 않고 끌려갔다. 시민을 설득하지 않고 선동했다. 화합 대신 분열을, 용서 대신 증오를 이야기했다. 그 결과, 훗날 히틀러라는 희대의 악마가 등장할 조건의 하나가 완성됐다. 만약 그러하지 않았더라면 뤼거는 오스트리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치가의 반열에 올라 링슈트라세를 상징하는 또 다른 위인이 됐을 텐데. 아쉽고 안타깝다.

히틀러가 反유대주의 계승하는 바람에… 기피 대상으로

히틀러
히틀러

카를 뤼거는 위인인가 악인인가? 이 논쟁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뤼거는 낮은 계층 출신이었지만 최고의 교육을 받은 교양인이자 지성인이었다. 그는 권력을 잡기 위한 수단으로 반(反)유대주의를 활용했지만 뼛속까지 반유대주의자였단 증거는 없다.

그는 반유대주의와 쌍(雙)을 이루는 게르만 민족주의에 대해 분명하고 일관되게 반대해 왔다. 집권
후에는 '누가 유대인인지는 내가 결정한다'는 유명한 말로 반유대주의의 폭발력을 둔화시켰다.

그러나 히틀러가 저서 '나의 투쟁'을 통해 카리스마와 대중적 매력이 널리 알려진 뒤부터, 뤼거는 기피 대상이 됐다. 2012년에는 극우 정당의 반대에도 1934년부터 '카를 뤼거 박사'로 명명돼 있던 링슈트라세의 시청~빈 대학 구간 이름이 '대학로'로 바뀌기도 했다.



출처 :조선일보 /2018/0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