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와 혁신가 중에서는 인종·국적의 원천이 다양한 ‘하이브리드 인재’가 많습니다. 여러 정체성의 합체가 빚어내는 창의성을 무기로 화제를 부르는 이들이 있습니다. 정치·종교의 핍박을 피한 이주민이나 후손이 국가의 명운을 가르기도 합니다. 인재를 빼앗고 빼앗기는 시대를 맞아 국경을 초월해 족적을 남기는 이들의 삶을 들여다 봅니다.
얼마전 서울 시내 한 대학에 강의를 나갔을 때 일론 머스크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제가 ‘머스크가 원래 어느 나라 사람인 줄 아느냐’고 물었는데, 남아프리카공화국(이하 남아공)이라고 정확하게 알고 있는 학생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습니다.
머스크는 누구나 알고 있는 우리 시대의 혁신가입니다. 올해 재산은 2650억달러(약 339조원)에 달해 미국 잡지 포브스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1위에 올려놓고 있습니다. 머스크는 테슬라로 전기차를 상용화시키고, 스페이스엑스로 우주여행 시대를 앞당기고 있죠. 이외에도 남들이 가보지 못한 사업 영역을 여럿 개척했습니다.
머스크의 활동 무대는 주로 미국입니다. 그래서 그가 원래부터 미국인이었던 걸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제가 특파원으로 일하며 2017년 말부터 4년간 살던 유럽에서도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글로벌 노마드’라는 타이틀로 묶을 저의 첫 뉴스레터는 머스크가 태어난 나라 남아공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간 스토리를 다뤄보려고 합니다. 우리 시대 최고 혁신가의 유년 시절과 그의 이주 스토리는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괴짜 부모 밑에서 태어난 괴짜 소년
머스크는 1971년 남아공의 행정 수도인 프리토리아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쪽 조상은 영국에서 남아공으로 넘어온 사람들이죠. 머스크는 외가 쪽으로는 독일계 피를 물려받았습니다. 외할아버지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로 넘어온 독일인 이주민 공동체 출신이죠.
머스크의 외할아버지는 캐나다로 이주해 살다가 머스크의 어머니 메이(Maye) 머스크를 낳은 뒤 가족을 데리고 남아공으로 넘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메이 머스크는 캐나다·미국·남아공의 삼중 국적자죠. 어머니가 캐나다계라는 것은 후일 머스크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됩니다.
머스크의 아버지 에롤(Errol)은 전기·기계 엔지니어, 비행기 조종사, 선원 등 여러 직업을 가졌던 괴짜였습니다. 어머니 메이도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죠. 모델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습니다. 보그·타임·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 등 유명 잡지 표지 모델로 등장한 적 있습니다. 지난달 프랑스의 칸 영화제 시상식에도 나타나 사진기자들의 플래시 세례를 받았습니다. 메이는 영양학 석사 학위가 있는 영양사이기도 합니다.
돈 버는 능력은 머스크의 아버지 에롤도 상당했습니다. 그는 잠비아 탕가니카 호수 근처에 있는 에메랄드 광산의 지분을 저렴할 때 사서 절반 갖고 있었죠. 그랬다가 광산이 나중에 대박을 쳤습니다. 머스크가 어릴 적 돈이 넘쳐 집안의 금고를 잠그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에롤 머스크는 언론 인터뷰에서 이야기한 적 있습니다.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학폭 피해자 머스크
머스크는 어릴 적부터 남다른 아이였다고 합니다. 독서의 양과 깊이가 보통의 아이들과 달랐습니다. 니체와 쇼펜하우어를 읽었습니다. 또 초인에 가까운 기억력을 가진 소년이었습니다.
그는 10살 때이던 1981년 무렵 컴퓨터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개인용 컴퓨터가 걸음마 단계이지만 가격이 서민들은 엄두도 못 내던 시절이죠. 머스크의 부자 아버지 에롤은 아들에게 컴퓨터를 사주는 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10살 무렵 머스크가 갖고 있던 가정용 컴퓨터는 캐나다 기업 코모도어의 VIC-20이란 모델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 컴퓨터로 주로 게임을 했다고 합니다.
머스크는 프로그래밍을 독학으로 배워 12살 때 ‘블래스터’라는 비디오 게임을 만들었습니다. 이 게임은 머스크가 공상 과학소설에서 영감을 얻어 설계한 게임인데요. 베이직(BASIC) 언어로 만든 이 게임의 소스 코드를 게임 잡지에 돈을 받고 팔았답니다. 천재적인 머리와 돈벌이 재능이 어린 시절부터 있었던 거죠. 전기 회로도 짜는 법을 어릴 때 다 익혔다고 합니다.
그런데 머스크는 워낙 ‘특이 소년’이라서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했다고 합니다. 머스크는 후일 미국에서 성공한 뒤 “남아공에서 학교 다닐 때는 ‘잘난 체 하는 놈(smart aleck)’으로 불렸다”라고 털어놓은 바 있습니다. 남아공 학교가 머스크 같은 튀는 아이를 받아들일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던 거죠.
머스크는 동년배 아이들한테 툭하면 얻어맞은 학교 폭력 피해자였습니다. 그가 브라이언슨고등학교라는 곳을 다닐 때 그를 괴롭히던 친구가 계단에서 넘어뜨린 바람에 입원하기도 했습니다.
2015년 뉴욕타임스 컬럼니스트 애슐리 밴스는 머스크와 30시간을 독점 인터뷰한 뒤 그의 삶을 되돌아본 책 ‘일론 머스크, 미래의 설계자’를 펴냈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당시 머스크가 계단 맨 위에 앉아 있는데 누군가 발로 머리를 차서 굴러 떨어지는 바람에 크게 다쳤다고 합니다. 학교 폭력에 시달리던 시절 머스크는 “외로움을 이기려고 공상과학 소설을 읽었다”고 했습니다.
◇남아공 모교에 단돈 8000만원만 기부
머스크는 5년제 중등교육과정 첫 2년을 브라이언슨고에서 보냈지만 따돌림과 폭력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결국 아버지 에롤은 아들을 보이즈고등학교라는 곳으로 전학시켰습니다. 보이즈고는 남아공의 공립학교 중 가장 학비가 비싼 학교라고 합니다. 나중에 미국에서 크게 성공한 이후 머스크는 보이즈고의 요청을 받고 모교에 100만랜드를 기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원화로는 불과 8000만원 정도인 금액입니다.
학창 시절을 포함해 남아공에서의 어린 시절 때 좋은 기억을 갖고 있지 못한 머스크는 남아공 사람들이 들으면 기분 좋아할만한 의례적인 립서비스도 거의 하지 않습니다. 지난 5월 뉴욕타임스는 머스크의 남아공 시절에 대한 특집 기사를 내보내면서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해달라며 머스크에게 이메일을 보냈지만 답을 얻지 못했다고 밝혔습니다.
머스크에 대한 책을 쓴 애슐리 밴스는 “머스크가 모교인 보이즈고에 기부금을 보내고 ‘다시는 내게 연락하지 말라’고 했다”고 했고, 이런 주장에 대해 보이즈고측에서는 “머스크는 연락하지 말라고 한 적이 없다”며 반박한 적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왜 머스크는 남아공 뿌리에 대해 언급하는 걸 꺼리는가’라며 의아하다고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분열된 조국에 환멸 느낀 머스크
남아공 교육은 머스크와 같은 비범한 학생의 잠재력을 키워주지 못했습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2015년에 76개국 학생들을 대상으로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를 실시한 결과 남아공은 75위였습니다. PISA는 학생들의 언어 문해력, 수학 문제 해결 능력 등을 비교합니다. 문제는 남아공의 교과 수준이 낮은 데 그치지 않습니다. 머스크는 부잣집 자식이라 그나마 괜찮은 학교를 다녔지만, 학사 관리가 엉망인 남아공에는 월급만 챙기고 출근조차 하지 않는 교사가 많다고 합니다.
머스크는 남아공에 대해 점점 실망감을 크게 느낍니다. 남아공의 뿌리 깊은 흑백 인종 갈등도 그가 고국에 정을 뗀 이유 중 하나입니다. 흑백 분리 정책을 뜻하는 아파르트헤이트 탓에 그는 남아공의 현실과 유리돼 백인 커뮤니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주변의 증언에 따르면 머스크는 그래도 흑인 친구들과 제법 어울리는 편이었다고 합니다. 후일 미국에서도 흑인들과 친구였다는 점에서 인종 차별적인 태도가 없다는 점이 부각되기도 했습니다. 어쨌거나 어수선하고 인종간 갈등이 첨예한 남아공에서 정서적 안정을 찾지 못했다는 게 어린 시절 머스크를 지켜봤던 사람들의 증언입니다.
뉴욕타임스 분석에 따르면, 머스크가 어린 시절 남아공은 백인사회도 분열돼 대립중이었다고 합니다. 아프리칸스어(남아공에서 사용하는 네덜란드어에서 분화된 언어)를 구사하는 네덜란드·독일·프랑스 출신 이주자들이 정치 권력을 쥐고 있었고, 머스크네 가족 같은 영어를 쓰는 백인들은 돈이 많아 나라의 경제를 좌지우지했습니다. 양쪽 그룹 백인들이 대립하는 어지러운 사회 분위기가 이어졌습니다.
◇군 입대 피해 캐나다로 건너가 기회를 잡다
결국 머스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남아공을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목적지는 미국이었습니다. 세상이 미국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는 게 이유입니다. 미국에서 새로운 기회를 잡아 보고 싶었다고 그는 후일 이야기합니다. 계속 남아공에 있으면 징병제 국가인지라 군대에 입대해야 하기 때문에 이걸 피하려는 목적도 있었다고 인정했습니다.
이때 머스크가 쉽게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건 어머니가 캐나다 국적자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당시 캐나다는 부모 중 한 명만 캐나다 국적을 갖으면 자식에게도 캐나다 입국과 체류를 쉽게 허용했습니다.
머스크는 쉽게 캐나다 입국 허가를 받은 뒤 대서양을 건너 캐나다 온타리오주에 있는 퀸스대학에 들어가 물리학과를 2년 다녔습니다. 그곳에서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인 펜실베이니아대에 편입을 했고 물리학과 경제학을 이중 전공하면서 석사 통합 과정을 졸업합니다.
그리고 나서 머스크는 서부로 넘어갑니다. 1995년 스탠퍼드대 박사과정에 합격했지만 곧 그만두고 창업을 합니다. 그 해 처음 만든 회사가 인터넷 기반 지역 정보 제공 업체인 Zip2였고, 4년 후 컴팩에 매각하고 2200만달러를 벌었습니다. 이 돈으로 온라인 금융 서비스 업체 x.com(컨피니티와 합병 후 페이팔로 개칭)을 세웠다가 2002년 이베이가 페이팔을 인수하면서 머스크는 1억6500만달러라는 거액을 손에 쥡니다.
이후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듯 스페이스X, 테슬라, 솔라시티 등을 잇따라 세워 혁신을 선도합니다.
◇머스크가 원래 미국에서 태어났다면?
세계적 미래학자 돈 탭스콧은 현대사회의 가장 위대한 CEO로 일론 머스크를 꼽았습니다. 혁신 제품으로 거대 기업을 세운 사업가는 여럿이지만, 누가 인류의 미래를 개척하는지까지 따지면 머스크가 으뜸이라는 게 탭스콧의 이야기입니다.
머스크는 남아공 탈출을 꿈꿨고, 미국에서 대학을 다닌 이후 타고난 재능이 만개했습니다. 머스크는 계속 미국에서 사업을 일궜고, 그가 창출한 막대한 부가가치와 일자리는 미국인들이 나눠 갖고 있습니다.
가정을 해봅니다. 머스크가 만약 계속 남아공에 있었더라면 어땠을까요. 아마도 지금의 머스크는 없었을 겁니다. 남아공이라는 어지럽고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는 나라가 머스크가 이뤄낸 기업들을 창업하고 키워낼 수 있는 무대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죠. 어쩌면 머스크가 대서양을 건너지 않았다면 인류가 전기차 시대를 좀 더 늦게 맞이했을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머스크가 남아공에서 캐나다와 미국으로 건너갈 때 언어 장벽은 없었다는 점입니다. 미국인들이 쓰는 말이 모국어였다는 점은 머스크로서는 대단한 행운이자 큰 무기였다고 봅니다.
만약 머스크만큼의 혁신가이고 잠재력이 있는 사람이 있더라도 한국, 일본, 대만 같은 아시아 국가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다녔다면 그의 미래는 어떨까요. 머스크처럼 미국행을 감행하기 어려웠을 수도 있고, 건너갔다고 하더라도 머스크만큼 성공하기 쉽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만약 머스크가 원래부터 미국에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하는 가정도 해봅니다. 미국이란 나라가 가진 엄청난 기회를 생각해보면 지금의 머스크처럼 성공했을 가능성도 꽤 있죠. 하지만 어린 시절의 숱한 어려움을 극복한 머스크, 다양한 인종적·역사적 백그라운드를 갖춘 머스크는 없이 그냥 평범하게 머리 좋은 백인 중년 남성으로 성장했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가 미국의 백인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비루한 현실을 뛰어넘어 머나먼 곳에서 성공하겠다는 꿈을 키우지 않거나, 그럴 필요가 없는 평범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머스크의 인생 경로가 지금 이 시대에 한국 사회에 던질 수 있는 메시지가 있다고 여깁니다. 한국은 남아공보다는 훨씬 훌륭한 교육 체계와 산업 인프라를 갖춘 나라입니다. 그래도 자문해봐야 합니다. 머스크 같은 천재가 우리에게 있다면 그가 나라에 실망하지 않고 긍정적인 젊은이로 자라게 할 수 있을지, 우리 품 안에서 성공하게 해서 이 땅에서 부(富)를 거머쥐고 미래를 설계하도록 키워낼 수 있을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인재가 외국에서 능력을 꽃피울 때 “저 사람은 한국인”이라며 뒤늦게 떠드는 건 허망한 일 아닐까요.
조선일보 2022.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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