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하는 글

[사설] "나라가 썩었다"

부산갈매기88 2011. 6. 20. 08:41

이명박 대통령은 17일 전 부처 장·차관들이 모인 워크숍에서 "오늘 (국민원로회의에서) 각계 원로들을 모셨는데 국민들에겐 나라가 온통 썩은 것처럼 보인다고 하시더라"고 했다. 대통령은 "오늘의 혼란스러운 일을 보고 국민들이 아주 당혹스러워하고 걱정을 많이 한다. 도대체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가, 온통 나라가 비리투성이 같고…" 하면서 "여기 모인 사람들이 크게 각성의 시간을 갖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국민들은 지난 몇달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공직자 부패 사건을 접해 왔다. 공직 부패는 힘있는 기관일수록 심하지만 힘이 없는 듯 보이는 기관이라 해서 공직 부패의 예외가 아니다. 그만큼 몇년 사이 공직 부패가 전(全) 기관 전 직급으로 번져간 것이다. 700곳이 넘는 공공기관 중에 가장 청렴도가 높은 우수기관으로 선정된
기상청마저 몇년 전 기상관측장비 구매 비리가 터졌을 정도다.

감사원은 공직 기강의 최고 감사기관이다. 대통령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해서 대통령 수석 비서를 지낸 사람의 취임을 비판해 좌절시켰을 정도다. 그 감사원의 한 감사위원은 저축은행의 검은돈을 받고 압력을 행사한 혐의로 구속됐고, 다른 감사위원 두 명도 피감기관 관계자와 접촉했다는 구설에 시달리고 있다. 감사원의 감사결과를 확정하는 권한을 가진 차관급 감사위원 6명 중 3명이 이런 상태다. 금융감독원은 저축은행 비리와 관련해 전 원장을 비롯해 전·현직 10여명이 비리혐의를 받고 있다. 뇌물 받는 비리(非理)의 형태도 시늉만 하는 감사, 정보유출, 정책왜곡, 가족의 인사청탁 등 갖가지다. 검찰과 법원 역시 전관예우라는 형태로 내 식구 봐주기, 퇴임 후 자신의 앞날 보장이란 비리에 젖어 있다. 국세청과 공정거래위원회의 고위 직급 퇴직자는 물론이고 중간급 퇴직자까지 로펌과 민간기업의 고문을 맡고 있다. 이들이 연봉 수억원을 받는 이유는 전 근무처와 관련된 사건을 끌어와 옛 후배들에게 청탁하는 것이란 사실은 비밀이 아니다. 공직자들의 부패 감시 감독 기관들이 이 지경이면 일선 공무원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얼마 전
이건희 삼성 회장은 계열사 임직원들이 협력업체들로부터 술·골프 접대를 받는 비리가 적발된 뒤 "삼성그룹 전체에 부정부패가 퍼져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삼성은 내부 감사시스템이 그런 대로 잘 갖춰진 걸로 평가받는 기업이다. 중소기업 사장들은 "(대기업 임직원에게) 룸살롱에서 술 사고, 골프 치면서 돈 잃어주는 것은 기본"이라고 말한다. 중소기업은 대기업을 접대하고, 대기업은 공무원을 접대하는 부패의 연쇄 사슬이 뿌리 내린 것이다. 경제가 발전해서 나라의 수준이 올라가면 사회도 함께 맑아지는 법인데 우리는 반대로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부패도 함께 자라나고 있다.

국제투명성본부가 해마다 발표하는 부패인식지수(CPI) 순위에서 한국은 지난해 5.4로 조사대상국 178개국 중 39위였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국 평균치(6.97)에 크게 못 미쳤다. 우리나라 CPI는 2009년·2010년 2년 연속 하락했다.

성장 동력을 유지하는 일, 복지의 틀을 다시 짜는 일, 남북 통일에 대비하는 일도 다 중요하다. 그러나 최우선 과제는 부패로부터의 탈출이다. 복지만 해도 부패의 사슬을 끊지 못하면 복지에 쏟아 붓는 돈이 약하고 어려운 사람들 대신 힘깨나 쓰는 사람들에게 흘러가고 말 것이다. 가장 걱정되는 일은 이 나라에 부정과 부패와 비리에 대한 경각심이 완전히 무너져 버린 것이다. 정계·관계·재계·법조계만이 아니라 학계·문화계까지 다 함께 비리의 흙탕물에 떠내려가고 있다. 역사에 비리와 부패를 안고도 버틴 나라가 없다. 아직도 분단의 사슬에 매인 대한민국은 제국(帝國)도 부패로 해서 무너져 내렸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껴야 한다.

 

<조선일보: 2011. 6. 20일 사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