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학 만물박사

장미 15만 송이

부산갈매기88 2011. 7. 28. 11:49

1997년 영국 다이애나 왕세자빈의 장례가 진행되는 동안 그녀가 살았던 켄싱턴 궁전은 애도의 장미꽃으로 뒤덮여 있었다. 다이애나의 친구였던 엘튼 존이 히트곡 '캔들 인 더 윈드'를 개작해 불렀다. "안녕, 영국의 장미여. 당신은 우리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으리…." 이듬해 1주기 때 캘리포니아의 한 원예가는 꽃잎이 넓고 향기가 달콤한 연분홍 장미 품종을 개발해 '다이애나'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는 이 장미에서 나온 수입의 절반을 다이애나 추모기금으로 내놓았다.

 

▶남북전쟁이 끝나자 북군의 존 로건 장군은 전사자 무덤을 장미와 백합으로 장식하라는 포고령을 1868년 5월 30일 내렸다. 이날은 미국 전몰자 추도기념일 '메모리얼 데이'가 됐다. 이 기념일을 '데코레이션(Decoration) 데이'라고 부르는 건 무덤을 장미로 '장식'했던 데서 나왔다. 그래서 여러 주(州)에선 장미축제와 겹친다. 1912년 매사추세츠 직물공장 여공들은 파업을 하며 "빵과 장미를 원한다"고 외쳤다. 이때 장미는 인권을 상징한다.

▶중세 유럽에선 장미가 기독교와 밀접했다. 장미가 홑꽃이고 꽃잎이 다섯인 것이 기독교의 '성스러운 5'와 일치했기 때문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다섯 곳에 상처가 났고, 장미는 그리스도의 피에서 비롯된 은총·자선·순교를 의미했다. 천주교는 장미 열매를 줄로 매달아 묵주로 썼다. 이슬람에서도 장미는 예언자의 피를 상징했다. 영국뿐 아니라 이란·이라크도 장미가 국화(國花)다.

 

▶16세기부터 유럽 각 지역에서 고유 민속예술이 움틀 때 노르웨이에선 장미 그림에서 유래한 목재가구 꽃장식 '로즈말링'이 발달했다. 이것은 뒷날 나라의 상징처럼 됐다. '인형의 집'을 쓴 입센이 여름휴가를 보내던 롬스달피오르 북쪽 해변의 몰데는 '장미의 도시'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발코니와 거리마다 장미로 덮인 도시에서 봄이면 재즈축제, 8월이면 국제 문학페스티벌이 열린다.

 

▶그제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15만 인파가 테러 희생자를 애도하기 위해 손에 손에 장미를 들고 나와 '장미행진'을 벌였다. 나라 인구가 490만이고 오슬로 인구가 60만이다. "15만은 2차대전 이후 처음 보는 인파"라는 노인의 증언도 있었다. 모두가 눈가에 눈물을 달고 있었지만 손에는 색색의 장미를 들었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꽃을 이기는 총(銃)은 없다는 것을.

 

조선일보 김광일 논설위원 kikim@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