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단체와 노동단체 시위대 5000여명이 소위 '희망버스'를 타고 부산 한진중공업으로 몰려갈 때마다 온몸으로 막아낸 사람들은 부산 시민들이다. 서울에서 내려간 대한민국어버이연합 회원 250여명도 노구(老軀)를 이끌고 부산 시민을 도왔다. 경찰 병력 수천명도 물난리가 난 수도권 복구 사업을 뒤로 미룬 채 부산에 투입됐다.
그러나 정작 한진중공업 조남호 회장은 회사에도 부산에도 없었다. 조 회장은 지난 6월 17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가 참고인으로 부르기로 결정한 바로 그날 일본으로 출국했다. 당시 조 회장은 공문을 보내 "6월 17일부터 7월 2일까지 일본, 유럽 등으로 출장을 가게 돼 국회 출석이 어렵다"고 밝혔다. 이후 귀국 예정일로부터 한 달이 지난 오늘까지 조 회장은 외국을 떠돌며 돌아오지 않고 있다.
조 회장은 한진중공업 지주(持株)회사인 한진중공업홀딩스의 지분 46.5%를 갖고 있는 최대 주주이고, 한진중공업 대표이사다. 작년 12월 영도조선소 근로자 400명 정리해고를 결정한 회사의 최종 의사결정권자다. 그는 작년 말 경영상의 어려움을 이유로 정리해고 계획을 밝힌 다음 날 곧바로 주주들에게 주식으로 170여억원을 배당하도록 해 근로자들을 더 자극함으로써 사태를 결정적으로 악화시킨 원인(原因) 제공자이기도 하다.
한진중공업 측은 "조 회장이 외국 바이어와 기자재 업체 관계자들을 만나며 선박 수주 활동을 하고 있다"고 했다.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지금 조 회장에게 한진중공업 사태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일은 없다. 공장이 멈춰 있는데 수주 활동은 해서 뭘 하겠다는 것인가. 자신의 결정으로 비롯된 사태에 외부세력이 끼어들어 온 나라를 흔들고, 부산 지역 경제까지 큰 타격을 받고 있다. 그뿐 아니라 이대로 가다간 회사의 생명이 위태롭다.
그런데 주인이라는 조 회장은 국회에 불려 나가 험한 꼴 당하기 싫다는 이유로 48일째 해외를 떠돌고 있다. 그에겐 최고경영자로서 회사의 생사(生死)에 대한 책임의식의 그림자도 찾을 수 없다. 그런 그에게 자기 회사 때문에 고통받는 지역 주민을 향한 죄(罪)의식이 있을 리 없다. 하물며 그런 그에게 기업을 잘 운영해서 종업원을 먹여 살리고 나라에 보탬이 되겠다는 기업인의 각오가 있을 턱이 없다.
조 회장 같은 무책임한 오너 경영인 한 사람이 '신속한 의사 결정과 위험을 무릅쓴 과감한 투자를 통해 기업을 성장시킬 수 있다'는 한국적 오너 경영의 옹호 논리를 산산조각으로 만들고 있다. 조 회장은 꾸물거리지 말고 즉각 귀국해야 한다.
<조선일보 2011. 8. 03 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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