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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명한 재판장

부산갈매기88 2011. 10. 19. 08:05

2002년 3월 수원지법 210호 법정 주변은 소환장을 받고 온 인근 아파트 주민 1087명으로 북새통이었다. 주민들은 아파트 근처 공사장 때문에 어린이 등굣길이 위험하다며 공사를 방해해 건설사로부터 방해 금지 가처분신청을 당한 처지였다. 법정엔 200명밖에 들어갈 수가 없어서 먼저 입장한 사람들이 심문을 받고 나오기를 차례로 기다려야 했다. 주민들은 "왜 사람들을 모두 불러 이 난리를 치르느냐"며 흥분했다.

▶재판이 시작되자 재판장이 "좁은 법정에 여러분을 모셔 죄송하다"고 입을 열었다. "여러분 모두에게 소환장을 보낸 것은 주민 한 분 한 분에게 충분한 발언기회를 드리려는 뜻입니다. 밤을 새우는 한이 있더라도 의견을 다 듣겠습니다." 주민들은 잇달아 손을 들고 나와 공사판 주변 통학로의 위험성을 호소했고 재판장은 주민 의견을 일일이 받아적었다. 주민들은 어느새 화가 풀렸고 재판은 무사히 끝났다. 법조계에서 재판장의 현명한 진행 사례로 꼽히는 일화다.

▶능란한 재판장은 말 한마디로 방청객이나 재판 당사자들을 진정시킨다. 재판 쟁점을 분명히 부각시켜 검사와 변호인이 엉뚱한 문제로 설전을 벌이는 것을 막기도 한다.
전두환 정권 때 서울대생 박종철군을 고문하다 죽인 경찰관 5명의 재판정에서 방청객들이 경찰관들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재판장은 "아무리 극악한 범죄자라도 질서 있고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했다. 이 한마디는 오히려 방청객의 고함과 욕설을 부추겨 법정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버렸다.

▶엊그제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의 첫 재판에서 재판장이 "변호인과 피고인이 오해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며 검사와 곽 교육감에게 자료를 돌렸다. 법률학 교과서의 선거법 해설이었다. 재판장은 "사전 약속을 했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후보자 사퇴 대가로 금품을 제공하기만 하면 범죄가 성립한다고 돼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간 곽 교육감은 "(경쟁 후보였던)
박명기 서울교대 교수에게 후보 사퇴 대가로 돈을 주겠다는 약속을 한 적이 없고 나중에 형편이 어렵다는 얘기를 듣고 선의로 줬을 뿐"이라고 주장해왔다. 재판장은 그런 곽 교육감에게 "약속을 했는지는 재판의 쟁점이 아니니 그런 걸 갖고 다투지 말라"는 언질을 준 셈이다. '사전 약속' 여부를 놓고 양측이 끝없는 설전을 벌이는 걸 막으려는 재판장의 센스가 빛났다.

 

조선일보/김낭기 논설위원 ngkim@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