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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 長壽 대국의 그늘

부산갈매기88 2011. 11. 18. 08:22

#2009년 4월 20일 일본 시즈오카의 한 공동묘지. 가수 겸 배우로 일본인들의 사랑을 받던 시미즈 유키코(淸水由貴子·49)씨가 아버지의 묘지 앞에서 자살한 채 발견됐다. 시신 옆에는 휠체어를 탄 그녀의 엄마가 실신한 채 발견돼 주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2006년 어머니의 병간호를 위해 은퇴를 선언한 그녀는 병간호에 성심을 다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읜 그녀는 누구보다도 어머니를 사랑했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간병 생활의 피로와 우울함을 견딜 수 없었던 모양이다.

#지난 9월 하마마쓰(浜松)시의 한 주택에서 노인부부가 숨진 채 발견됐다. 남편(94)이 부인(92)을 살해하고 자살한 것으로 경찰은 결론내렸다. 남편은 평소 주위 사람들에게 "아내 병간호에 너무 지쳤다"고 푸념했다고 한다. 최근 일본 검찰은 69세의 아내를 살해한 72세의 노인에게 징역 4년을 구형했다. 20년간 병중에 있는 아내를 간호하던 남편은 부인의 목을 졸랐다. 부인은 자신의 병치료로 계속 늘어나는 빚과 남편의 고생을 안타까워하며 "나를 죽여달라"고 몇 번이나 부탁했다고 한다.

장수대국 일본은 한국보다 훨씬 촘촘한 노인복지를 자랑하지만, 간병자살과 간병살인의 비극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일본 경찰에 따르면 간병에 따른 피곤 누적 등으로 자살하는 사람이 연간 300명이 넘는다고 한다. 일본에서 간병자 8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4명 중 1명이 우울증 상태였으며 65세 이상 간병자의 30%는 "자살하고 싶다"고 답했다.

일본은 2000년 4월 노인 간병 등을 돕기 위한 간병(개호·介護)보험을 도입, 재택(在宅)간병과 시설 입원 간병 등을 지원하고 있다. 65세 이후에는 간병비의 10%만 본인이 부담하면 된다. 하지만 급속한 고령화로 노인인구가 급증하면서 시설 입원 대기자 수가 40만명이 넘는다. 아무리 제도가 좋아도 24시간 정부가 도와줄 수는 없다. 또 부모나 아내를 보호시설에 넣을 수 없다는 동양적 정서로 인해 집에서 간병하는 경우도 많다.

일본은 저출산, 고령화, 핵가족화로 인해 노인이 노인을 간병하는 '노노(老老) 간병'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간병하는 사람이 75세 이상인 경우가 25%를 넘는다. 부모의 간병을 위해 결혼도 직업도 포기한 '간병 싱글족(族)'도 급증해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간병 전문인력도 턱없이 부족하다. 간병인들은 인력부족으로 24시간 근무하는 등 열악한 환경이지만 급여가 적다 보니 80% 이상이 3년 내 전직한다.

더 큰 문제는 재정난 등으로 인해 현재의 혜택을 축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2000년에는 4조엔 정도이던 간병보험 지급액이 최근 8조엔으로 늘어났다. 75세 이상 고령자의 1인당 평균의료비는 연간 85만2000엔으로 그 이하 연령대(18만2000엔)보다 4배 이상 많다. 젊은 세대들은 "가난한 우리 세대가 왜 노인들을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느냐"며 불만이다.

일본보다 더 빠른 속도로 초고령화 시대로 질주하는 한국도 지금부터 지혜를 모으지 않으면 장수(長壽)가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될 수 있다.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