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방

<포의환향(布衣還鄕)의 신앙으로...." > 2012. 7.22. 주일설교 부산성산교회 이용수 목사

부산갈매기88 2012. 7. 26. 16:46

<포의환향(布衣還鄕)의 신앙으로...." >

                                                    2012. 7. 22(일) 주일설교      부산성산교회  이용수 목사

 

약 2:1~13

 1 내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2 만일 너희 회당에서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 올 때에

 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고 보고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들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4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6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를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7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

 8 너희가 만일 성경이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 하는 것이거니와

 9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11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12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1.포의환향(布衣還鄕)의 신앙으로......

  오늘 설교의 제목을 이렇습니다.   '포의환향(布衣還鄕)의 신앙으로....'  여기서 '포의환향(布衣還鄕)이라는 말은 아마 처음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 말은 금의환양(錦衣還鄕)이라는 말에서 따 온 것입니다. 금의환양(錦衣還鄕)이라는 말의 뜻은 '비단 옷을 입고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뜻입니다.

 

  우리나라 고유 명절이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갑니다. 그렇게 고향을 찾을 때 모두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는 게 바로 이 금의환양(錦衣還鄕)의 갈망입니다. 소위 말해서 성공하고 출세해서 남들 보기에 좋게 가기를 원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다보니 떄로는 아니면서 허세를 부려보기도 합니다. 자기 차도 아니면서 친구의 차를 대신 빌려 타고 가는 경우도 생겨납니다.

 

  그렇다면 포의환향(布衣還鄕)의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여기서 포의(布衣)는 일반 백성들이 입는 흰 베옷을 가르킵니다. 영적으로 '포의'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요한계시록 7장 9절에서 사도 요한은 구원받은 천국의 백성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포의)를 입고..."

 

  천국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입은 옷은 하나입니다. 바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흘려주신 주님께서 입혀주실 바로 의의 옷, 흰 옷(포의)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절대의로 금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포의이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차별이 없어야 합니다. 천국의 지상 모델인 교회도 이것은 마찬가지이어야 합니다.

 

 

2.차별하지 말라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이상한 말씀을 듣게 됩니다. 바로 '차별'이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분명하게 나오지 않지만 원문을 보면 오늘 본문에서는 세번씩이나 "차별하지 말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차별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십자가 위에서 세워진 교회 안에서도 차별은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교회 안에서 세상적인 관습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십자가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차별할 수 없는 성도를 차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3.왜 차별하지 말아야 합니까?

  9절 말씀에 보면 차별은 분명히 죄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만큼 하나님 아버지께서 십자가로 구원하신 성도를 차별하는 것을 미워하십니다.

 

  왜 우리가 차별하면 안 됩니까?

  첫째 영관의 주님 안에서 한 형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아교보는 이 야고보 안에서 '형제'라는 단어를 무려 20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영광스러울 수 있는 것은 그가 가진 세상의 지위나 명예나 권력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의 영광은 바로 그들을 구원하신 '영광의 주님' 때문입니다. 또한 그 주님을 영원한 신랑으로 모시고 살 신부들이기 때문에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신랑이 영광스러우면 신부도 영광스러운 것은 당연합니다. 

 

  왜 차별하지 말아야 합니까?

  둘째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동일하게 모두 은혜로 된 것이기 떄문입니다. 세상에서는 자리 다툼이 많습니다. 서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그리고 자리마다 다 가격이 매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다릅니다. 우리 모두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우리 스스로 댓가를 지불한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천국은 사랑할 것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그러니 어찌 차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왜 차별하면 안 됩니까?
  셋째 우리 모두는 사랑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경의 핵심 가르침은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셨듯이 너희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할 대상이기 떄문에 서로 차별하거나 차등을 두어서는 안 된다 하십니다. 본문 13절을 보면 "긍휼을 행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긍휼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사랑을 나타내십니다. 자비한 자에게 자비하심을 보여 주십니다. 그러니 차별함이 우리 가운데 없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영광스러운 주님처럼 찬란한 모습으로 변케 될 형제자매들입니다.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 살게 될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여기에 무슨 차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이 엄청난 신분은 세상의 것으로 그 값을 매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무슨 차별이 존재하겠습니까? 기독교 신앙은 포의환향의 신앙입니다.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끝까지 십자자 하나 붙들고 그것만으로 서로의 가치를 평가하면서 더욱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는 천국의 모델되는 우리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