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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게 기적'인 목사, 쪽방촌에서 기적을 만들다

부산갈매기88 2012. 10. 5. 08:10

암 수술 후 쪽방촌 돌아온 김흥용 목사
걸인들 돕는 건 하늘이 준 사역… 함께 폐지 줍고 자립 지원했더니
정부도 관심 갖고 상담센터 생겨
위암에 뇌졸중까지 왔었지만 다시 교회 열고 사명 다하기로… 아들도 뒤이어 섬김의 길 나서

햇볕 한 줌 들지 않는 1평 남짓한 방들. 음식과 땀을 버무린 듯한 퀴퀴한 냄새가 골목에 마중 나와 있다. 서울 남산 자락 빌딩 숲 사이, 중구·용산구 일대의 '쪽방촌'에는 아직도 1700여 세대가 산다. 지난 3일 김흥용(73) 목사가 그 방문 하나를 열고 들어섰다.

"추석 때 속초 누님 잘 뵙고 왔어?" 한쪽 눈에 안대를 한 김모(71)씨가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으며 답했다. "아이고 목사님, 아랫동네 박씨, 요 옆집 이씨 다 먼저 갔잖아요. 우리 집 6남매 중에도 올해 아흔넷인 둘째 누님만 남았는데, 내가 잘됐어야 반갑지…." 쪽방촌 생활 27년째인 김씨. 그 손을 꼭 잡으며 사는 얘기를 묻던 김 목사가, 방문을 닫고 돌아서며 말했다. "날 보면 사람들이 갑자기 아프다고, 배고파 죽겠다고 매달려요. 진통제만 사주고 가려다가 설렁탕이라도 싸들고 가고…." 그는 이곳 주민들과 살을 부대끼며 15년간 생활해온 '쪽방촌의 대부(代父)'다. 위암 수술 받고 3년 만에 다시 목회 준비를 하면서 최근 회고록 '쪽방동네 거지왕초'(우리하나)를 펴냈다.

◇양복 재단 가위를 든 거지 왕초

강원도 삼척이 고향인 김 목사는 군 제대 후 무작정 상경해 걸인(乞人) 생활을 했다. 교회를 다니면서 다시 공부를 해, 1975년 보리차 끓이는 일용직 사환으로 한국은행에 들어갔고, 2년 뒤 정규직 도서관 사서가 됐다. 1983년 신장 수술로 죽음의 위기를 넘긴 뒤 신학 공부를 시작해 1993년엔 목사 안수도 받았다. 퇴직 1년 뒤인 1996년, 서울역 주변의 걸인들을 눈여겨보던 그는 가족 앞에서 폭탄선언을 했다.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귀한 사역을 발견했다." 직접 걸인 생활을 해본 그는 씻지 못하는 고통이 뭔지 누구보다 더 잘 알았다. 1997년 퇴직금 3000만원을 털어 용산 쪽방촌에 50평짜리 목욕탕 겸 쉼터 '나사로의 집'을 만들었다. 이발 가위로는 손질이 불가능한 걸인들의 머리를 커다란 양복 재단 가위로 쓱싹쓱싹 잘라줬다. 코끼리 등짝처럼 덕지덕지 앉은 때를 밀어주고, 후원받아다 새 옷 입히고 새 신발을 신겼다. '거지 왕초'라는 별명도 이때 붙었다.

3일 오후 서울 남산 자락의 쪽방촌에서 김흥용(오른쪽) 목사가 주민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헌신의 대가로 빈털터리가 됐지만, 그는 오늘도 쪽방촌을 떠나지 못한다.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머리를 단정히 깎고 새 옷을 입으니 그들은 더 이상 구걸을 할 수 없었다. "밥줄 끊겼다"는 그들을 위해 생각해낸 것이 폐박스 줍기였다. "나를 따라 폐지를 주우면 쪽방을 잡아준다." 걸인들은 밤 12시가 되면 나사로의 집 앞에 모였다. 용산 후암시장과 남대문시장으로 나눠 리어카를 끌고 돌아다니며 폐지를 주웠다. 김 목사는 각자 명의의 통장을 만들어 또박또박 입금해줬다. IMF 사태로 처음 '노숙자' 개념이 생겼을 때, 김 목사의 사역을 모델 삼아 중구와 용산구에 쪽방촌 상담센터가 생겼다.

김 목사는 사실 '왕초'라기보다 '머슴'이다. "쪽방 주민이 죽으면 한밤중에도 119보다 먼저 나한테 전화해요. 시체 썩는 냄새 견디며 장례 뒷바라지하고 나면, 시립묘지에 봉분도 없이 이름 새긴 바닥 돌 하나만 남지요. 강아지 납골당도 있는 세상에…."

◇죽음보다 강한 소명, 그걸 물려받은 아들

사실 김 목사는 걸어 다니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2005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병원에 갔지요. MRI 사진을 보더니 의사가 '환자 어딨느냐'고 물어요. 제가 환자인 걸 안 믿는 거예요. 뇌가 꺼멓게 죽었는데 절대 걸어 다닐 수가 없다고." 2010년엔 위암 판정을 받고 두 번 수술 끝에 위를 모두 들어냈다. 이미 1980년대 초에 오른쪽 신장을 적출하고 좌측은 3분의 2를 잘라냈는데, 얼마 전에는 남은 신장 안에 손가락 두 마디만 한 결석까지 생겼다.

그의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쏙 빼닮았다. 열매나눔재단(이사장 김동호 목사) 사무총장 김범석(43) 목사다. 아들은 평생 10원 한 푼 집에 갖다 준 적 없는 아버지를 보면서, 절대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자랐다. 하지만 철이 들면서는, 낮에 과일 장사를 해 나사로의 집 운영 자금을 댔고, 밤엔 아버지의 사역을 도왔다. 어렵게 신학대를 졸업할 무렵, 당시 높은뜻숭의교회를 담임하던 김동호 목사가 "쪽방촌과 노숙자 구제 사역을 맡아 달라"고 그를 붙잡았다. 아들 목사는 "아버지에게 물질은 받지 못했지만, 세상을 사랑하는 법, 가난한 사람을 섬기는 법을 배웠다"고 했다. 아버지 목사는 "남들은 큰 교회 세워 물려준다지만 내겐 쪽방촌뿐인데, 이곳 경험을 거름 삼아 더 크게 들어 쓰시는 하나님 섭리에 놀랄 뿐"이라고 했다.

요즘 김 목사는 쪽방촌에 다시 교회를 열 희망에 부풀어 있다. 헌신의 대가로 빈털터리가 된 그는 대체 왜 쪽방촌을 떠나지 않는 걸까. "저는요, 제게 주신 사명이 죽음보다 강하다고 생각해요. 지금도 사람들이 제 손을 잡으며 '목사님, 다시 예배 좀 드리게 해주세요' 하는 걸요. 다른 교회에서 불러주면 어디든 달려가서 간증도 하고, 손 닿는 대로 일도 하려고요. 제 쪽방촌 사역은 이제 다시 시작입니다."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