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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크로네시아 酋長의 딸과 결혼…'태평양 해양 연구센터'의 터줏대감 김도헌씨

부산갈매기88 2013. 5. 13. 07:11

"이 섬에서 가장 심한 욕은 '욕심쟁이'… 손을 내밀면 당연히 돈을 줘야 해"
"발전기 돌릴 기름이 없어… 밤에 양초 켜고 지내바람 소리에도 놀라 잠깨"
"흑진주 양식 기술 개발 성공… 앙드레김과 투자 양해각서 체결, 그가 사망하는 바람에 무산돼"

미크로네시아에 오게 된 것은 우연히 어떤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 오지의 섬나라에 우리가 세운 '태평양 해양 연구센터'가 있고 여기서 원주민 추장(酋長)의 딸과 결혼한 직원이 10년 넘게 근무하고 있다는 것이다.

항공편은 괌(Guam)에서 격일로 있었다. 하루를 기다린 뒤 남동쪽으로 1시간 40분 날아갔다. 607개 섬 4개 주로 이뤄진 미크로네시아(북위 7도 동경 152도)에서 내린 곳은 '축(Chuuk)'주였다.

태평양의 밤하늘에는 노란 별들이 빛났지만, 지상의 도로에는 군데군데 웅덩이가 파여 낮에 쏟아졌던 빗물이 그대로 고여있었다.

다음 날, 태평양 해양 연구센터에서 '추장의 사위'라는 김도헌(50)씨를 만났다. 그는 몸에서 물기가 다 빠져나간 사람 같았다.


	김도헌씨는“리조트에서 일하는 원주민 여인에게 결혼 의사를 묻고 사흘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고 말했다. /최보식 기자
김도헌씨는“리조트에서 일하는 원주민 여인에게 결혼 의사를 묻고 사흘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고 말했다. /최보식 기자
"저는 원래 배 만드는 회사에서 일했지요. 1996년 말쯤 미크로네시아에서 리조트 사업을 시작한 분이 우리 회사로 찾아와 '태평양 섬에서 낚시와 다이빙을 위한 배를 만들 계획인데 현지에 와서 일해줄 사람이 없느냐'고 했어요. 직원 열댓 명 중에서 제가 자원했어요. 그때까지 외국에 한 번도 나가본 적 없는 서울 사람이 태평양의 섬나라까지 오게 된 거죠."

그는 아홉 달을 머물렀다. 당초 계약대로 현지인들을 데리고 낚싯배 두 대를 만들었다. 떠나려는데 섬의 아름다움이 그를 붙잡았다고 한다. 리조트 사장에게 '혹시 사람이 필요하지 않으냐'고 물었다.

"그렇게 해서 다시 들어와 배 만드는 일을 하게 됐어요. 당초 2~3년 지내다 돌아갈 작정이었는데, IMF 사태가 터졌어요. 서울에선 실업자가 쏟아지는 판이니 제가 돌아갈 데가 없어진 거죠. 여기서 살기로 마음먹고 원주민 여인과 결혼했지요."

그는 리조트의 식당에서 일하는 원주민 여인 세 명을 나란히 앉혀놓고 차례로 '나와 결혼할 의사가 있느냐?'고 물었다. 첫째와 둘째는 '생각해봐야겠다' '싫다'고 답했고, 마지막 여인은 '하겠다'고 했다. 사흘 뒤 그 여인과 결혼했다.

―장난처럼 들리는군요.

"그때 제 나이가 서른다섯이었어요. 저를 받아주는 여자면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결혼한 뒤 부부 싸움을 할 때면 아내는 '왜 그때 셋 중 제일 끝 순서로 내게 결혼 의사를 물었느냐'며 따져요."

―부인이 추장의 딸이라고 하던데.

"이 섬에는 4개 부족의 추장이 있는데, 그중 한 분이었지요. 일찍 돌아가셨어요. 저는 직접 뵙지는 못했어요."

―배 만드는 일을 하다가 어떻게 '태평양 연구센터'와 연결됐습니까?

"2003년쯤 리조트 사장이 양식업에 손댔다가 실패하고 인명 사고까지 나는 바람에 사업을 접었어요. 그냥 귀국해버린 겁니다. 당시 한국해양과학기술원은 이 리조트의 사무실 두 개를 빌려 '태평양 연구센터'를 개설했어요. 상주 연구원들을 파견하진 않았어요. 리조트가 폐쇄되자 실험 장비와 집기를 놓아뒀던 연구센터로서는 난처하게 됐죠. 저도 서울로 들어갈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해양과학기술원에서 '연구센터 관리를 대신 맡아달라'고 부탁했어요."

'태평양 연구센터'는 김대중 정부의 작품이다. 1999년 한·일 어업협정 때 독도를 '한·일 중간 수역'으로 정하고 '쌍끌이 조업'도 협상에서 누락해 여론이 악화됐다. 이를 의식한 청와대는 '우리는 작은 곳에서 다투지 않고 태평양으로 진출하겠다'고 발표했다. 구체적 청사진이 준비된 것은 아니었다. 연구센터 간판만 걸어놓았고, 연간 예산은 1억원에 불과했다.

­섬에서 연구원이 아닌 김 선생이 대신 연구센터를 지켰다는 말이군요.

"이곳 원주민들은 태평양 섬에서 가장 거친 편입니다. 종종 칼부림도 나고. 외지인은 늘 주시되고 있죠. 저는 연구센터 재산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폐쇄된 리조트에서 혼자 숙식했어요. 그믐밤에는 두 손이 안 보일 정도로 캄캄합니다. 발전기를 돌릴 기름이 없어 양초를 켜고 지냈어요. 바람 소리가 들려도 놀라 잠에서 깨곤 했죠. 그렇게 3년을 버텨 연구원이 들어왔을 때 정말 눈물이 났어요. 사람이 살면서 가장 견디기 힘든 게 외로움이거든요."

―어떤 조건으로 관리를 해준 겁니까?

"관리 비용을 받은 적이 없었죠. 해양과학기술원에서는 '조금만 참아달라. 나중에 잘해주겠다'고 했어요. 그 덕분에 현지 계약직이 됐어요(웃음). 정식으로 봉급을 받은 게 2010년부터인가. 하지만 한국에 있었다면 고등학교밖에 못 나온 보잘것없는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연구센터 박사님들과 인연이 닿았겠어요. 이 섬에 있어서 제가 의미 있는 거죠."

초창기부터 이곳을 오갔던 박흥식(48) 박사가 2006년 센터장에 임명되면서, 연구원 두 명이 상주하게 됐다. 이들은 3개월마다 교대한다. 사무실 두 개였던 태평양 연구센터는 이제 리조트 전체를 쓰고 있다.

연구센터와 관련된 인물은 다들 사연이 있다. 박 센터장은 해양과학기술원에서 비정규직으로 12년간 일하다가 2003년 정규직이 됐다. 외국 유학이나 일류대 출신도 아니고 근무 경력도 짧은 그가 '센터장' 후보로 거론됐을 때 내부에서 말이 많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태평양에 열정을 가진 사람을 찾는 게 쉽지 않았다. 그는 7년째 연구센터를 이끌고 있다.

김한준(38) 연구원은 대학생 시절 리조트에 와서 3년간 아르바이트를 했다. 리조트가 폐쇄되면서 봉급을 떼였다. 참담한 경험으로 다시는 여길 오지 않겠다는 그를 박 센터장이 설득해 스카우트했다. 그는 1년의 절반을 여기서 근무한다. 여전히 비정규직이다.

연구센터는 작년 한 해 과학 연구실험용 샘플 800㎏을 국내로 보냈다. 열대 원시 생물인 '해면'에 포함된 항암 물질 연구, 우주선 안의 식량인 '스피룰리나(열대 플랑크톤)' 생산, 10억달러 규모의 시장이 있는 관상용 열대어 배양, 고급 단추 재료로 쓰이는 단추조개 양식 등이 여기서 진행되고 있다.

연구센터는 '흑진주' 양식 기술 개발에도 일부 성공했다. 2010년 앙드레김(패션 디자이너)과 사업화를 위해 30억원을 투자받는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하지만 그해 앙드레김이 사망하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다.

여러 분야의 과학자들이 가끔 여기에 찾아와 연구 과제를 수행한다. 센터 앞에는 항공우주연구원의 위성 추적기, 천문연구원의 정밀 GPS 장치, 기상 관측대도 설치돼 있다. 여름철 한반도로 불어오는 태풍의 8할이 여기서 생성된다. 이 낯선 섬의 기상 변화는 우리와 직접 연결되는 셈이다.

다시 김도헌씨 인터뷰로 돌아가자.


	태평양 연구센터의 송한주·김한준씨, 박흥식 센
터장(왼쪽부터).
태평양 연구센터의 송한주·김한준씨, 박흥식 센 터장(왼쪽부터).

―김 선생이 결혼한 뒤로 부족 여인들이 한국인 남편에 대해 다들 부러워했다면서요?

"한국에서 냉장고, 에어컨, 세탁기, TV 등을 들여왔거든요. 하지만 생활에는 별로 도움이 안 됐어요. 작년 말까지는 전기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으니까요. 램프와 양초로 보냈죠."

―부인은 김 선생과 결혼했으면 좀 더 문명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한국에 들어와 살고 싶어 하지 않나요?

"아내와 함께 한국에 서너 차례 다녀온 적이 있어요. 잠깐 놀다 오는 것은 좋은데, 한국에서 살라고 하면 미쳐버릴 겁니다. 원주민 중에는 괌이나 하와이로 돈 벌러 나가기도 하지만, 대부분 못 버티고 돌아와요."

―열심히 일해서 한 푼이라도 더 벌고 잘살아야겠다는 마음은 없는 모양이지요?

"여기서는 굶어 죽거나 얼어 죽지는 않아요. 코코넛이나 빵나무가 늘 자라고 있으니까요. 아무도 저축하지 않아요. 여기서는 2주마다 봉급을 줍니다. 한 달을 기다리지 못해요. 원주민 직원들은 시도 때도 없이 '가불 좀 해달라'고 합니다. 정작 봉급날에는 가불을 타 쓴 뒤라 표정들이 울적해요."

이 섬나라는 한때 미국령(領)으로 있다가 1986년 독립했지만, 여전히 미국은 이들을 자국민처럼 대우해준다. 이곳에서 태어나면 미국 영주권이 주어진다. 미국에 있는 대학에도 거의 공짜로 다닐 수 있다.

―완전히 다른 문화와 성장 환경을 가진 남녀의 부부 생활은 어떠했을까요?

"서로 생활 방식이 이해가 안 됐죠. 저는 집 안이 지저분하고 게으른 게 못마땅했고, 아내는 제가 밖에서 일만 하는 것에 불만이 많았어요. 이곳에는 집안 대소사가 있으면 출근하지 않아요. 결혼한 뒤 5년간 부부 싸움이 심했어요. 그래도 파경에 이르지 않은 것은 평소 영어로 말하다가 싸울 때면 흥분해 서로 못 알아듣는 자기 나라 말을 썼거든요."

―'모계사회'라는데 남편의 역할이 달라집니까?

"대외적인 공식 행사는 남자 위주이지만, 집 안에서는 여자가 실권을 쥐고 있어요. 자녀는 아버지 성(姓)을 이어받지 않고, 아버지 이름이 자녀 성(姓)이 돼요. 가령 내 자녀의 성은 '김'이 아니라 '도헌'입니다. 부계 혈통이 끊기는 거죠. 재산권도 장녀에게 상속됩니다. 여기서 결혼이란 남자가 여자 집으로 들어가 사는 거죠. 남편이 집에서 쫓겨나는 경우가 더러 있죠."

―김 선생도 이곳 전통에 따라 여자 집으로 들어가 살았습니까?

"아내도 '엄마와 같이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결혼을 앞두고 장모님 집에 가보니 황당했어요. 짓다 만 집이었어요. 지붕만 있고 벽을 만들어놓은 게 다였어요. 합판으로 방 칸막이를 해놓았어요. 창문이나 실내 화장실이란 것은 없어요. 시멘트 바닥에 야자수 잎을 엮은 돗자리를 펴고 자는 겁니다. 위로 결혼한 언니들은 바로 장모님 집 옆에 모여 살고 있었어요."

그는 결혼한 뒤로도 연구센터에서 숙식하고 있다. 그의 집은 센터에서 불과 200m 떨어져있다. 저녁을 먹고 '점호'하듯 집에 들렀다가 돌아온다.

"이제는 가서 자도 되는 상황이 됐지만, 이 나이가 되면 마누라 잔소리를 피하려고(웃음). 사실은 집에 가면 친척들로 늘 북적거려요. 물론 제가 들어가면 비켜주지만. 여기서는 어느 집 형편이 괜찮다고 소문나면 이렇게들 모여요. 우리 집에서 한 달간 먹는 쌀만 100㎏이 넘어요."

―가정생활이나 프라이버시가 별로 보호받지 못하는군요.

"작은 섬이라 서로 친·인척으로 연결돼 있어요. 옆집에 가서 얻어먹거나 꾸는 것은 자연스러워요. 빌리는 것은 갚아준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가진 자는 당연히 베풀어야 해요. '쌀이 떨어졌다' '아이가 아프다'면서 손을 내밀면 돈을 줘야 해요. 그건 부탁이 아니라 정당한 요구입니다. 이를 들어주지 않으면 작은 공동체 안에서 따돌림당합니다. 상대에게 가장 심한 욕이 '욕심쟁이'라는 겁니다."

광대한 태평양에는 육안(肉眼)의 경계선만 있었다. 앞바다는 연초록, 먼바다는 감청색으로 나눠졌다. 앞이든 뒤든 그 어느 바다도 결코 혼탁하지 않았다.<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