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관계

日本軍 위안소 버마 27곳·싱가포르 10곳… 軍 명령따라 이동

부산갈매기88 2013. 8. 7. 07:49

[안병직 교수, 일본군이 조직적으로 위안부 동원 증명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 공개]

-日本軍의 완전 통제하에 운영
특정 부대에 위안소 배속시켜 수입보고서·영업일보 내게 해
-"1942년 7월 '4차 위안단' 출발"
일제 치하 한반도에서 이미 몇차례 조직했단 명확한 증거
-위안부 그만둔 사람도 재차 끌려와
"위안부로 있다 나간 히로코, 병참 명령으로 다시 왔다더라"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
안병직〈사진〉 서울대 명예교수(한국경제사)가 6일 공개한 일본군위안소 조선인 관리인의 일기는 그동안 실체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던 일본군위안부 동원과 위안소 운영 실태의 상당 부분을 보여준다.

일기의 필자(1905~1979)는 1940년대 들어 통제경제가 강화되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하자 1942년 7월 일본군위안부를 모집해서 버마로 떠나는 처남에게 합류했다. 그가 버마와 싱가포르에서 남긴 일기에는 일본군위안소의 경영 실태와 일본군위안부의 생활상이 담겨 있다. 다만 1942년도 일기가 분실돼 일본군위안부 모집 과정에 대한 내용이 빠져 있는 점은 아쉽다.

일기는 한글과 한문을 주로 썼고 일본어도 섞여 있다. 문장은 한국어체(體)이지만 한문체로 읽어야 뜻이 통하는 곳도 많아 현대어 역(譯)이 필요하다.

일기를 통해 드러난 중요한 사실은 일본군이 일본군위안부를 여러 차례 조직적으로 동원했다는 점이다. 1942년 5월 일본군 남방파견군사령부는 조선군사령부에 위안부 모집에 대한 협조를 요청했다. 조선군사령부가 선정한 위안소 업자들은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감언이설과 목돈을 미리 주는 전차금(前借金·임금을 담보로 해 빌리는 돈)을 미끼로 위안부를 모집했다.

이들이 모집한 위안부들은 7월 10일 업자·관리인과 함께 부산항을 출발했다. "재작년 위안대가 부산에서 출발할 때 제4차 위안단 단장으로 온 쓰무라(津村)씨"(1944년 4월 6일)라는 일기 내용을 통해 일본군이 조선에서 이 외에도 위안단을 몇 번 조직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본군위안부 중 일부는 전차금 수백엔을 받았다. 그 돈은 군(軍)에서 나왔다는 게 연구자들의 분석이다. 일기에는 이를 뒷받침해주는 내용이 나온다. 일본군위안소 업자들은 위안소를 쉽게 양도하고 새 업자는 별 부담 없이 이를 인수했다. 일기의 필자 역시 처남이 사고로 죽은 뒤 그가 운영하던 일본군위안소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하지 않았다. 이는 일본군위안소가 사실상 군 소유이고, 업자는 경영만 담당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버마와 중국의 국경지대에서 발견돼 연합군의 보호를 받고 있는 조선인 일본군위안부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버마와 중국의 국경지대에서 발견돼 연합군의 보호를 받고 있는 조선인 일본군위안부들. 1942년 7월 부산에서 출발한‘제4차 위안단’은 버마의 일본군 주둔지와 주요 도시 지역에 배치됐다. /조선일보 DB
일기는 또 일본군위안소가 일본군의 완전 통제 아래 운영됐다는 점도 알려준다. 일기에 등장하는 일본군위안소는 버마에 27개소, 싱가포르에 10개소이다. 일본군위안소들은 '항공대위안소' '병참관리위안소'처럼 특정 부대에 소속돼 있었고, 수입보고서·영업일보 등의 보고서를 정기적으로 소속 부대에 냈다. "(랑군의) 인센에 있는 다카(高)부대, 즉 항공대 소속의 위안소 2개소가 병참 관리로 이양됐다더라"(1943년 7월 19일) "무라야마씨가 경영하는 위안소 이치후지루가 병참 관리로 되어"(7월 20일)라는 일기 내용처럼 소속 부대가 변경되기도 했다.

또 일본군위안소는 군의 명령에 따라 이동했다. "위안소를 55사단에서 만달레 근처의 이에우라는 곳으로 이전하라는 명령이 있어"(1943년 3월 10일) "페구의 위안소 오토메테이(乙女亭), 분라쿠관, 장교 클럽 등 서너 위안소는 이번에 아카브 지방으로 이동되었는데"(4월 15일) "가나가와씨는 위안소 이동설이 있다고 군사령부에서 알아보겠다더라"(8월 6일)는 일기 내용이 이를 입증한다.

일본군위안부 생활을 접었던 사람이 다시 끌려오기도 했다. "이전에 무라야마씨 위안소에 위안부로 있다가 부부 생활하러 나간 하루요(春代)와 히로코(弘子)는 이번에 병참의 명령으로 다시 위안부로서 김천관에 있게 되었다더라"(1943년 7월 29일)는 일기 내용이 이를 말해준다.


	일기 내용으로 본 일본군의 위안부 조직적 동원 증거.
일기를 통해 드러난 이러한 사실들은 일본군위안부를 민간업자가 모집했고, 위안소 업자가 영업을 위해 일본군 부대를 따라다녔다는 일부 일본 인사의 주장이 사실이 아님을 보여준다.

안병직 교수는 "일본군위안부는 징용, 징병, 근로정신대와 마찬가지로 일본이 전쟁이 본격화되자 전시(戰時) 동원 체제의 하나로 국가적 차원에서 강행한 것"이라며 "더구나 위안부들은 모집 때 그들이 할 일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고 인신매매에 가까운 수법이 이용됐다는 점에서 '광의의 강제 동원'이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2013. 8.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