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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결단: 퓰리처

부산갈매기88 2009. 3. 9. 09:05

언론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퓰리처상을 만든 조셉 퓰리처(Joseph Pulitzer.1847∼1911)는 현대 저널리즘의 창시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신문의 아버지’로서 이미 100여 년 전에 현대 신문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상업주의 언론의 모든 것을 보여준 사람이다. 그는 언론의 공정성과 상업주의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쫓았고 거기에 성공을 거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가난한 헝가리 이민자 출신인 퓰리처는 지역신문에 기고한 글이 편집장의 눈에 들어 신문사에 특채된 후, 신문기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는 기발한 아이디어와 치밀한 기자의식으로 특종을 연거푸 터뜨리며 기자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던 중 그는 적자로 허덕이던《뉴욕 월드》를 인수하면서 경영자로 나섰다. 일개 기자에서 신문 발행인이 된 그는 ‘재미없는 신문은 죄악이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신문 대중화에 열정을 쏟았다.

 

그는 글자만 있던 신문에 만평과 그림을 도입했고, 품위를 생명으로 생각했던 신문에 스포츠 연예기사를 도입했으며, 흥미와 오락 위주의 일요판 신문, 여기자 채용, 여성 패션 기사, 함정 취재 등 언론 최초의 사건들을 만들어냈다. 또한 퓰리처는 정치권력에도 굴하지 않는 신문의 힘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는 신문을 통해 민주주의 원칙과 사상을 철저하게 대중에게 각인시켜 나갔다. 그는 예민한 정치 문제를 신문에 다루면서 탄압하는 세력들과 당당히 맞서 싸웠다. 그는 신문이 독자들에게 단순한 재미만이 아닌 알 권리를 찾아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정부기관과 기득권 계층에 대한 공격이었다. 경제공황 때는 국민의 이익을 빼앗아가려던 정부와 JP모건의 음모를 파헤쳤고, 계속된 캠페인을 통해 부유층에게 유리한 조세제도를 개혁하는데 앞장섰다. 또 가입자들을 우롱하는 보험회사들의 비리를 폭로했고, 서민들의 생존이 정부에 달려 있음을 역설했다.

 

정부에 대한 공격으로 신문사의 운영이 위태로울 지경이었지만 독자들의 폭발적인 호응으로 발행부수는 점점 늘어갔다. 인수 당시 판매 부수가 1만 부에 불과했던 《뉴욕 월드》는 20년 만에 100만부를 돌파해서 미국은 물론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신문이 되었다. 그 당시 《뉴욕 타임스》의 발행 부수가 10만 부 내외였음을 생각할 때 실로 놀라운 기록이 아닐 수 없다.

 

퓰리처는 파나마 운하 건설의 비리를 덮으려는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과 당당히 맞섰다. 그는 구속시키겠다는 루즈벨트의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고 남북전쟁 이후, 최초의 민주당 대통령인 클리블랜드를 대통령에 당선시키기에 이른다. 이로서 퓰리처는 선거에서 신문이 특정 정치인을 지지하는 미국식 전통을 세운 것이었다.

 

퓰리처는 특권층이 아닌 ‘대중을 위한 봉사’라는 민주주의적 사상과 원칙을 철두철미하게 지켰다.

퓰리처는 기자를 “국가라는 배를 지키는 파수꾼”라고 비유할 만큼 중요한 직업으로 생각했고, 많은 언론인들이나 학자들이 대학에서의 언론학 교육이 필요치 않다고 주장할 때 칼럼비아 대학에 2백50만 달러라는 거금을 기부해서 언론인 교육의 제도화를 이끌어 냈다.

 

퓰리처는 유언장을 통해 컬럼비아대학교에 재산을 기부해 언론대학(School of Journalism)을 설립하도록 했고, 퓰리처상을 제정해서 1917년 이래 매년 언론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자들에게 수여하고 있다.

 

<중소기업뉴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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