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병우(公丙禹, 1906~1995)박사는 1938년, 국내 최초로 안과 병원을 개원한 의사였지만, 한글기계화운동에 평생을 바친 사람이다. 그가 한글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한글학자 이극로 선생이 안질 치료를 받으러 그의 병원을 찾은 후부터였다. 당시는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등 민족정기를 말살하려는 때였다. 그는 이극로 선생과의 대화를 통해서 한글연구가 독립운동 못지않게 시급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해방 이후 그는 실용적인 기계식 타자기 연구 개발에 들어갔고 한국 최초로 고성능 타자기인 ‘공병우식 한글 타자기’를 발명해 냈다. 공병우는 이 타자기를 널리 보급시켜야 한다는 소망을 가지고 문교부장관을 찾아갔다. 서너 번의 요청 끝에 간신히 이루어진 면담이었다. 그러나 장관은 그가 타자기를 가지고 무슨 돈벌이나 하려는 사람으로 취급하고 타자기의 성능도 제대로 테스트해 보지 않았다.
한글타자기의 놀라운 성능을 알아준 것은 놀랍게도 한국정부가 아닌 북한 군부였다. 6·25가 터지고 서울이 점령됐을 때, 공병우는 인민군에게 체포되는 신세가 됐다. 그는 의사로 돈을 많이 벌었다는 이유로 총살형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한글타자기의 놀라운 성능에 반한 인민위원회 위원장은 그의 사형을 면해 주고 오히려 한글기계화연구를 계속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는 인민군이 퇴각할 때 납북됐으나 탈출에 성공한 후, 더욱 본격적으로 한글기계화 연구에 몰두했다. 휴전협정 문서정본과 1965년의 한일기본조약의 문서도 공병우 타자기로 정리됐다.
특히 한일기본조약시에는 한국 측이 단 몇 시간 만에 서류를 공병우 타자기로 정리해내는 것을 보고 며칠씩이나 걸려야 하는 일본 측 사람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1968년 상공부가 비과학적인 네벌식 표준자판시안을 밀고 나오자 그는 자신이 개발한 세벌식 타자기의 합리성·효율성을 역설하면서 정부와의 싸움을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방식이 옳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했으나 정부는 효율적인 세벌식을 선택하지 않았다. 공병우는 세상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효율적인 글을 가지고 있으면서 정부와 식자들이 무지하고 무관심한 것을 통탄하면서 사재를 털어 한글문화원을 설립한다.
그는 자신의 인생의 의미는 한글연구와 그 기계화뿐이라고 밝히고, 한글의 효율성을 보다 높이지 않고서는 우리나라가 결코 선진국을 따라 잡을 수 없다는 주장을 평생 펴나갔다. 그러나 그는 한글연구에만 미쳤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누구보다 합리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고 삶의 올바른 지표를 제시하는데 한 치의 틈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해외에 갔다 오면서 가족들 선물을 사오는 대신 불우한 이웃에게 줄 선물을 사오는 사람이었다. 1952년에는 미국여행에서 돌아오면서 장님들에게 줄 흰 지팡이를, 1957년에는 앰블런스를 들여와서 제주도를 비롯한 전국을 순회하면서 돈이 없어서 치료를 받지 못하는 환자들을 치료해주었다.
1960년대부터는 장애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고 실명자 재활을 위한 기관을 설립하고 점자 한글타자기, 맹인용 한글워드프로세서 등을 개발했다. 그는 한글학회 이사, 한글기계화연구소 소장, 한글문화원 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한글 전용과 한글 기계화 및 전산화에 전력을 다했다.
1995년 3월 7일, 그는 ‘내 육신을 위한 무덤을 만들지 말고, 내 육신에서 쓸 만한 장기는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나머지는 의학도들이 공부하도록 병원에 보내라.’ 하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중소기업뉴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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