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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좇아 해외로…['잡 노마드' 시대가 온다] [2] 해외 취업… "출근이 설레요"

부산갈매기88 2016. 8. 24. 08:11

호주선 "칼퇴근 안하면 눈치"… 베트남선 "여가 활동만 8가지"

- 인도로 간 4인
"중국 경제력 넘어설 인도를 나만의 무기로 만들려고 도전
힘들지만 내 경쟁력 키울 기회"

- 네덜란드로 이직
"일할땐 엄격, 생활엔 자유로워… 회사가 삶과 일 균형 맞춰줘"

- 싱가포르로 이직
"상사와 출장 가서도 내 할일만… 주말·휴일엔 업무지시 전혀 없어"

- 중동에 승무원으로 취업
"사장 앞에서도 자유롭게 얘기, 개방적이고 평등한 분위기 만족"

국가별 한국인 채용 수요 직종 정리 표

"한국이나 인도나 똑같이 바쁘더라도 한 가지 차이가 있어요. 가슴이 뛰느냐, 뛰지 않느냐죠. 인도에서 전 매일 설렙니다. 빠르게 성장하는 이곳에서 2년만 고생하면 컨설팅 분야 전문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지방대를 졸업한 뒤 중견 가구 업체에 다녔던 이혜민(27)씨는 지난 2014년 회사를 그만뒀다. 입사 1년 만이었다. 주말도 없이 일했고, 자정을 넘겨 집에 들어 오기 일쑤였다. 사생활을 포기한 채 일만 하는 입사 10년차 선배의 삶이 부럽지 않다고 느껴졌을 때 회사에 사표를 던졌다. "일하면서 청춘이 소모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다시 한국 기업에 취업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고, 도전적인 성향을 살려 해외 취업을 준비하기로 했죠."

이씨의 눈에 대학 시절 40일 동안 여행한 '인도'가 들어왔다. 제2의 중국으로 부상하는 인도에서 일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인도로 날아왔다. 뉴델리 외곽에 있는 컨설팅 회사 까마인디아에 취업한 이씨는 여전히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일요일만 빼고 주6일 일하고, 연봉은 오히려 한국에서보다 1000만원쯤 줄었다. 직원이 30명뿐인 회사에서 이씨는 '멀티 플레이어'로 뛰어야 한다. 법인 설립 업무는 물론이고 바이어 연결, 시장 조사, 수출입 대행, 박람회 지원까지 하고 있다. 몸으로 부딪치며 실무 경력을 집중적으로 쌓은 셈이다. 인도 경제가 팽창하는 덕분에 회사 매출은 3년 만에 2.5배로 뛰었고, 이씨 연봉은 매년 15~20%씩 오르고 있다. 이씨는 "인도 생활이 100% 만족스럽다고 말할 순 없지만 적어도 '내가 커 나가면서 일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꿈'을 이루기 위해 떠난다

해외로 진출해 일자리를 찾은 '잡 노마드(Job Nomad)' 청년들이 처음 한국을 떠날 때는 저성장과 청년 실업난 등 국내 상황이 일차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이들을 몇 년째 해외에 머물게 하면서 현지에 적응하게 만든 것은 높은 연봉이나 대우 같은 것이 아니었다. 본지가 만나본 잡 노마드 청년들은 해외에서 일자리를 잡고 계속 머무는 이유로 '꿈을 이루기 위해' '일과 삶의 균형이 있어서' '합리적인 자유가 좋아서' 등이라고 답했다.

인도·싱가포르·UAE서 기회 찾았죠 - “가슴 뛰는 일을 하고 싶다”며 한국을 떠난 잡 노마드 청년들. 인도 뉴델리의 한국 컨설팅 업체 ‘까마인디아’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청년들이 인도인 직원들과 회의하고 있다(위 사진). 왼쪽부터 강효인·이혜민·이준형·이영준씨. 이유나(아래 작은 사진 오른쪽)씨는 싱가포르 화장품 회사에서 싱가포르인뿐 아니라 해외 각국에서 온 외국인 동료들과 일하고 있다. UAE 에미레이트 항공사 승무원으로 취업한 변주연(아래 큰 사진 왼쪽에서 둘째)씨가 유니폼을 입고 동료들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인도·싱가포르·UAE서 기회 찾았죠 - “가슴 뛰는 일을 하고 싶다”며 한국을 떠난 잡 노마드 청년들. 인도 뉴델리의 한국 컨설팅 업체 ‘까마인디아’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청년들이 인도인 직원들과 회의하고 있다(위 사진). 왼쪽부터 강효인·이혜민·이준형·이영준씨. 이유나(아래 작은 사진 오른쪽)씨는 싱가포르 화장품 회사에서 싱가포르인뿐 아니라 해외 각국에서 온 외국인 동료들과 일하고 있다. UAE 에미레이트 항공사 승무원으로 취업한 변주연(아래 큰 사진 왼쪽에서 둘째)씨가 유니폼을 입고 동료들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기문 특파원·이유나·변주연씨 제공

 

까마인디아에는 이씨 같은 20대 한국인 '잡 노마드'가 3명 있다. 이들은 하나같이 "기회의 땅 인도에서 승부를 보겠다"고 입을 모았다. 작년 8월 인도로 건너와 이씨와 함께 근무하는 이영준(26)씨는 "인도를 내 무기로 만들 수 있겠다 싶은 확신이 들었고, 내 경쟁력을 가꿔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 이곳에 온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면서 "중국 인구와 경제력을 넘어설 유일한 신흥국으로 주목받는 인도에서 구르다 보면 10년 뒤 제 가치가 10배, 100배가 될 거란 확신이 있다"고 말했다. 미국 대학을 휴학하고 온 인턴 이준형(25)씨 역시 인도 시장을 자신의 커리어 무대로 삼겠다는 열정으로 뜨거웠다. 이씨는 "한국에서든 미국에서든 일자리를 찾을 수는 있겠지만, 완전히 도전적인 일을 해보고 싶어 인도로 왔다"고 했다. 노영진(48) 까마인디아 대표는 "한국 청년들이 인도에 살면서 일하겠다는 각오를 하기란 쉽지 않다"며 "꿈을 안고 인도로 와 커리어를 시작하는 도전적인 젊은이들을 주축으로 회사를 운영해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네덜란드·미국 ‘일은 일, 여가는 여가’ - 잡 노마드 청년들은 외국 회사에서 ‘일과 삶의 균형’을 찾았다고 했다. 곽아영씨가 다니는 네덜란드 컨설팅 회사에서는 직원들이 쉬는 시간에 탁구를 치거나 단체 셀카를 찍고 다시 일에 집중한다(위 왼쪽 사진). 야유회에서는 카약 타기나 수영 대회가 열리기도 한다(위 오른쪽 사진). 미국 뉴욕의 박물관에서 일하는 황지은(아래 사진 뒷줄 맨 왼쪽)씨가 점심 시간에 동료 직원의 생일 파티를 즐기고 있다. 

네덜란드·미국 ‘일은 일, 여가는 여가’ - 잡 노마드 청년들은 외국 회사에서 ‘일과 삶의 균형’을 찾았다고 했다. 곽아영씨가 다니는 네덜란드 컨설팅 회사에서는 직원들이 쉬는 시간에 탁구를 치거나 단체 셀카를 찍고 다시 일에 집중한다(위 왼쪽 사진). 야유회에서는 카약 타기나 수영 대회가 열리기도 한다(위 오른쪽 사진). 미국 뉴욕의 박물관에서 일하는 황지은(아래 사진 뒷줄 맨 왼쪽)씨가 점심 시간에 동료 직원의 생일 파티를 즐기고 있다. /곽아영씨·황지은씨 제공

 

또 다른 '잡 노마드' 곽아영(28)씨는 누구나 부러워하는 국내 대기업을 박차고 나와 지난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미국계 컨설팅 회사에 취업했다. 곽씨는 네덜란드의 회사 문화가 "따뜻하고 친밀하면서도 일할 땐 엄격하게 시간을 지키는 분위기"라고 했다. 이 회사 점심시간은 딱 20분이다. 대부분 구내식당에서 혼자 해결한다. 나른해지는 오후 휴식 시간에 '생산성 높이기' 차원에서 팀원 모두 밖으로 나가 아이스크림을 사먹고 단체 셀카 촬영을 한다. 연 2회 회사 야유회에서는 카약 타기, 수영 대회가 열리고 기아 어린이 구호 활동도 한다. 정기 연수는 파리 교외로 떠나는데, 하루 5시간 공부하고 나머지 시간은 탁구를 치거나 휴식한다. 암스테르담 시내에 있는 사무실까지 자전거로 출퇴근한다는 곽씨는 "컨설턴트로서 바쁠 땐 야근과 주말 근무가 없진 않지만, 회사에서 삶과 일의 균형을 맞춰 주니 오랫동안 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5분 늦게 퇴근하면 "노동법 위반 말라"

"퇴근 시간이 벌써 5분이나 지났는데 왜 일을 하고 있는 거죠?"

지난해 초 호주 시드니의 한 보육센터에 유아 교사로 취업한 심현경(26)씨에게 센터장의 날카로운 질문이 날아왔다. 오후 5시 35분. 심씨는 아이들이 모두 하원한 후 뒷정리를 하느라 남아 있는 중이었다. 센터장은 "노동법을 어기면 안 되니 당장 퇴근하세요"라고 말했다. 호주에서 취업 직후 경험한 일이다. 심씨는 "처음엔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출근은 물론 퇴근 시간 관리까지 확실하게 하는 분위기가 깔끔하고 좋다"고 말했다. 대신 근무 중에는 동료와 잡담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다고 했다. 국내에서 조선업체 계약직 직원으로 일했던 심씨는 지난해 해외교육진흥원 공고를 통해 호주 현지에 취업했다.

해외에서도 분명 일은 힘들고, 특유의 성과주의가 부담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해외 기업은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면서도 업무 외 분야에서는 자율을 보장하기 때문에 직장 속에서 '합리적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잡 노마드들은 말한다.

해외 취업 만족도 그래프

국내 회사 생활을 접고 싱가포르에서 유럽계 컨설팅 회사로 이직한 정미영(가명·26)씨는 지난 4월 직속 상사와 함께 출장을 가게 됐다. 정씨는 비행기표 예약부터 현지 일정 등을 분주히 확인하고, 출장지의 주요 관광 코스와 식사 장소까지 정리해 보고를 올렸다. 하지만 상사는 손을 내저으며 "내 항공권과 숙박은 이미 예약했으니 자네 일정만 챙기라"고 말했다. 출장지에서도 함께 참여하는 미팅만 끝나면 각자 숙소로 돌아가 자유 시간을 가졌다. 정씨는 "한국에서 출장 가면 하급자가 수행비서, 가이드, 비용 처리에 업무까지 맡는 게 당연했는데, 해외 나와 보니 상하 관계라 해도 절대 개인 업무를 부과하진 않더라"고 말했다. 정씨는 또 퇴근 이후나 주말·휴일에는 개인 휴대폰을 통한 업무 지시가 일절 없다고 했다.

중동에서 승무원으로 취업한 변주연(26)씨는 "보수적이고 수직적일 줄로만 알았던 중동의 기업 문화가 오히려 한국보다 개방적이고 평등해서 놀랐다"고 했다. 변씨는 국내 기업에서 인턴으로 일하면서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기 어렵다 느끼고 해외 취업 쪽으로 구직을 했다. 변씨는 "회사에서 매달 1회 임원진과 승무원들이 모여 토론하는 '오픈 포럼'을 개최하는데, 사장 앞에서도 기술직·승무원들이 가감 없이 의견을 얘기한다"며 "여기서 수렴된 일반 승무원들의 의견이 종종 경영에 반영돼 업무 환경이 점점 좋아진다"고 말했다.

◇여가 시간 만끽하는 삶

잡 노마드들은 대부분 국내 또래들보다 훨씬 느긋한 휴가와 여가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유럽연합(EU) 국가들은 연평균 28일의 휴가를 보장하고 있다. 프랑스의 경우 남성의 60% 이상이 육아휴직을 하는 등 복지가 탄탄하다. 올해 초 프랑스에서 고객 관리 회사에 취업한 김은진씨는 "직장 여성의 삶을 전폭 지원해주는 직장 문화를 경험해보니 한국이 겪고 있는 저출산 문제의 해결책이 여기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호주의 식품 회사에 취업한 임나레(26)씨는 호주의 장점으로 "나이에 얽매이지 않고 뭔가를 배울 수 있는 여유"를 꼽았다. 임씨는 "마흔 살이 된 동료가 갑자기 바이올린을 배우겠다고 하고, 마케팅 공부하러 대학에 가겠다고 하니 다들 응원해주는 분위기였다"며 "덩달아 나도 한국이었다면 상상할 수 없는 폭넓은 선택지가 주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아시아권이라고 근무 여건이 나쁜 것도 아니다. 베트남의 한 섬유 회사에 취업한 조승우(32)씨는 일과 후 참여하는 여가 활동만 8가지에 이른다. 현지 풋살 동호회에 가입해 매주 토요일 연습 시합을 하는 것을 비롯해 피아노, 테니스, 밴드, 영어, 베트남어 등을 시간 나는 대로 배우고 있다. 조씨는 "활달하고 인간관계 쌓길 좋아하는 성격과 잘 맞는 것 같다"며 한동안 베트남에 머물겠다고 말했다.

 

<조선일보/2016. 8.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