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앞두고'
곽낙원,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1920년대 초, 중국 상하이 융칭팡(永慶坊·영경방) 10호 골목 뒤와 인근 시장통의 쓰레기장. 한 작달막한 60대 노파가 밤이 되면 이 쓰레기장들을 뒤졌다. 노파가 수집하는 물건은 배추껍질 등 중국 사람들이 먹고 버린 채소였다. 노파는 쓰레기장에서 모은 채소로 소금에 절인 음식을 만들거나 시래깃국처럼 끓여 죽을 만들었다. 이 음식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정') 요인들의 식탁에 올랐다.
상하이 임정은 당시 자금이 바닥나 백범 김구 등 요인들은 굶기를 밥 먹듯 했다. 이들의 배를 채워주기 위해 쓰레기통을 뒤진 사람은 백범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였다. 곽 여사가 해가 떨어진 밤에 '활동'한 것은 중국인 등 외국인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였다.
후에 백범은 일지에 "(어머니가 귀국하신 뒤) 나는 인이를 데리고 여반로(呂班路) 단층집을 세내어 석오 이동녕 선생과 윤기섭, 조완구 등 몇 분 동지들과 같이 살며 어머님께서 담가주신 우거지김치를 오래 두고 먹었다"라고 적었다. 곽 여사는 백범을 낳아 가르쳤고, '임시정부의 어머니'로 불린 또 다른 영웅이었다.
백범과 임정 요인들이 일제의 추적을 피해 난징(南京·남경)에서 생활할 때였다. 곽 여사의 생일을 앞두고 임정 요인들과 청년단 단원들이 생일상을 차릴 돈을 모으고 있었다. 이를 눈치챈 곽 여사는 모은 돈을 갖고 있던 엄항섭 선생을 불러 돈을 달라고 했다. 그 돈으로 먹고 싶은 것을 직접 만들어 먹겠다는 것이었다.
생일, 곽 여사는 임정 요인과 청년들을 자기 셋방으로 초대한 뒤 식탁 위에 물건을 싼 보자기를 내놓았다. 보자기 안에는 권총 두 자루가 들어 있었다. 여사는 "독립운동하는 사람들이 생일은 무슨 생일인가"라고 꾸짖은 뒤 "이 총으로 왜놈을 한 놈이라도 더 죽여라"고 말했다. 여사는 받은 돈으로 총을 산 것이다.
이에 앞서 여사가 자싱(嘉興·가흥)에서 생일을 맞을 때도 임정 요인 부인들이 옷을 선물했다가 혼쭐이 났다. 여사는 "난 평생 비단을 몸에 걸쳐 본 일이 없네. 우리가 지금 이나마 밥술이라도 넘기고 있는 것은 온전히 윤봉길 의사의 핏값이야! 윤 의사 피 팔아서 옷 사 입을 수 있나!"라고 호통쳤다. 당시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로 외부의 자금지원이 적지 않을 때였는데, 여사는 옷 산 돈을 윤 의사의 핏값으로 비유한 것이다. 여사는 급기야 선물을 모두 밖으로 집어 던졌다고 한다.
여사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어느 날 손자가 "할머니는 어떤 기도를 하세요"라고 묻자 "일본 놈들이 빨리 망해서 우리나라가 독립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한다"라고 대답했다.
1939년 4월 24일 충칭(重慶·중경). 여사는 아들 백범을 불렀다. "창수(백범의 본명)야! 네가 열심히 노력해서 하루라도 빨리 나라의 독립을 실현해다오. 에미는 그날을 볼 수 없겠지만 네가 성공해서 돌아가는 날, 나와 아이들 어미(최준례 여사)의 유골을 갖고 돌아가 고국 땅에 묻어다오." 여사는 이틀 뒤 파란만장했던 생애를 마감했다. 백범은 "이 불효자 때문에 어머니가 평생 고생만 하시다 이렇게 돌아가셨다"며 땅을 치고 통곡했다고 한다. 여사의 유해는 충칭 인근 화상산(和尙山)에 묻혔다가 광복 후, 1948년 손자 김신의 손에 의해 한국으로 와 반장(返葬) 됐다.
(참고=여시동 저 '인간적인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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