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영국의 이순신' 넬슨 제독과 전함 빅토리호
- 포츠머스 해군기지의 빅토리호
당시 모습 그대로 완벽하게 보존, 전투중 총맞고 쓰러진 곳 등 표시
그 자체로 살아있는 박물관 역할
- 나폴레옹으로부터 조국 구해
이탈리아에서 허 찔렸지만 인도 가는 길목 나일강서 대승
트라팔가르 해전서 쐐기 박아
"England expects that every man will do his duty."
1805년 10월 21일 오전, 스페인 남부의 트라팔가르 해협. 영국 함대와 프랑스 함대가 충돌하기 직전 갑판으로 나온 넬슨은 신호장교에게 마지막 메시지를 전달했다. "영국은 모든 대원이 각자의 의무를 완수할 것이라 믿는다." 넬슨의 그 유명한 명령과 함께 전투가 시작됐다. 31척의 영국 전함과 33척의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의 대격돌!
넬슨은 언제나처럼 전열의 맨 앞에 섰다. 전투는 처음부터 격렬했다. 영국이 승기를 잡았지만 연합 함대의 저항도 만만찮았다. 양쪽 다 이 전투의 무게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후 1시 15분쯤, 기함(旗艦) 빅토리(Victory)호에서 진두지휘하던 넬슨이 총에 맞았다. 왼쪽 폐와 척추가 부서지는 치명상이었다. 넬슨은 스스로 마지막임을 깨달았다. 아직 전투는 한창이었다. 넬슨은 자신이 쓰러진 사실을 숨긴 채 부하들을 독려했다. '승리'가 아닌 '완벽한 승리'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조국의 운명을 위해서. 넬슨의 최후는 전투가 끝나기 직전 찾아왔다. "신에게 감사한다. 나는 내 의무를 다했다." 전투는 완벽한 넬슨의 승리로 끝났다. 하나밖에 없는 목숨 대신, 조국을 지켜냈고 대영제국의 기반을 남겼다.
빅토리호로 가는 길
그날 넬슨이 탔던 기함 빅토리호는 영국 남부 햄프셔주의 군항(軍港) 포츠머스에 있다. 런던에서 남서쪽으로 110㎞ 떨어져 있는 포츠머스는 영국의 가장 중요한 군항이었고 지금도 해군의 도시다. 현대적인 밝은 분위기가 감돌지만 해군기지 쪽은 다르다. 붉은 벽돌 건물들이 즐비한 가운데 해군기지와 왕립해군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다.
신분증 검사를 마치고 안으로 들어가면 바다를 호령했던 위대한 전함들이 야외에 전시돼 있다. 헨리 8세가 자랑했던 메리로즈호(號)와 영국 최초의 철갑전함인 워리어호가 있다. 그러나 언제나 사람들이 가장 몰리는 곳은 트라팔가르 해전 때 넬슨 제독의 기함이었던 빅토리호다. 거대한 삼단의 목재 범선인 빅토리호의 위용은 보는 이를 압도한다. 당시 모습으로 완벽하게 보존된 전함은 하나의 완벽한 박물관이다.
배 안으로 들어가 정해진 루트를 따라 갑판까지 나오면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위대한 뱃사람들의 일상과 전투가 일목요연하게 보인다. 영국인들이 어떻게 바다를 제패해왔는지, 어떻게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켰는지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러나 가장 강렬한 인상을 주는 곳은 넬슨이 총탄을 맞고 쓰러진 상갑판의 한 지점과 넬슨이 최후를 맞은 아래갑판의 한 지점이다. 두 지점에는 표시가 돼 있다. 그 앞에 서면 말을 잃게 된다. 많은 생각이 떠올라서다. 위대함이란 무엇인가? 영웅이란 어떤 존재일까? 참 리더란 무엇을 이룬 사람일까?
프랑스 혁명으로 뒤바뀐 넬슨의 운명
허레이쇼 넬슨(Horatio Nelson·1758 ~1805)은 노퍽주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해군 장교였던 외삼촌의 도움으로 13세 때 처음 배를 탔다. 사관후보생도 시절부터 선원으로서의 항해 기술 습득에 놀라운 열정과 재능을 보였던 넬슨은 착실하게 해군 장교의 길을 걸었다.
프랑스 혁명(1789년)은 프랑스와 유럽, 세계의 운명을, 그리고 넬슨의 인생까지 바꾸었다. 프랑스 혁명 후 전 유럽이 전쟁터가 된 탓이다. 오스트리아·프로이센·러시아는 왕정을 무너뜨린 프랑스 혁명을 용납하기 어려웠다. 이미 오랫동안 법치를 토대로 대의제와 입헌군주제를 발전시켜온 영국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100년 넘게 식민제국 건설 경쟁을 벌여온 라이벌 프랑스가 혁명을 통해 더 강력한 나라로 부상할지도 몰랐다. 섬나라 영국의 기본적인 국가 전략은 바다에서는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하는 한편 대륙이 강력한 한 나라의 손아귀에 떨어지지 않도록 견제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對)프랑스 전쟁에 참여했지만 전황은 영국에 불리했다. 혁명을 통해 프랑스는 강력한 근대 국가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용병이 아닌 국민병으로 구성된 군대, 무능한 귀족이 아닌 유능한 평민 장교가 이끄는 군대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기존의 대륙 왕정국가들에게 프랑스는 버거운 상대였다.
넬슨과 나폴레옹의 건곤일척 승부
바다 상황은 달랐다. 영국의 강력한 해군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넬슨처럼 10대 초반부터 배에서 평생을 살아온 바닷사람들이 지키는 바다는 프랑스 해군이 넘볼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넬슨에게 주어진 임무는 지중해의 중심에 위치한 이탈리아 반도를 프랑스군대의 마수로부터 지켜내는 것이었다. 넬슨은 프랑스군의 보급로가 될 제노바 앞바다를 봉쇄했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프랑스 군대의 총사령관 나폴레옹이 영국 해군이 지키는 바다를 버리고 알프스를 넘은 것이다. 발상의 전환으로 영국의 해군력을 무력화시킨 나폴레옹의 군대는 북이탈리아에 주둔한 오스트리아 군대를 격파했다. 넬슨과 나폴레옹의 운명적인 첫 대결은 이렇게 나폴레옹의 승리로 끝났다. 나폴레옹과의 간접 대결에서 패배한 넬슨은 원인을 분석했다.
나폴레옹의 대군(大軍)이 이동하려면 엄청난 보급이 필수였고, 그 규모의 보급을 이동시키려면 해상 경로가 필수였다. 그런데 허를 찔렸다. 알프스를 건너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프랑스 군대가 병참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굶주려도 추워도 그들은 진격했다. 군대의 성격이 바뀌어 가능했다. 이제 더 이상 그들은 국왕을 위해 돈을 받고 싸우는 용병(傭兵)이 아니었던 것이다. 전쟁의 성격도 변했다. 나폴레옹은 구체제의 장군처럼 형식적인 승리를 위해 싸우지 않았다. 그는 상대를 완전 전멸시키고자 했다. 그럼으로써 적의 의지를 꺾고 완전한 승리를 거두고자 했다. 넬슨은 영국의 전략도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육지 대신 바다에서, 해군의 힘을 바탕으로 싸워 이겨야 한다고 판단했다. 넬슨도 나폴레옹과 같이 적을 섬멸함으로써 상대의 의지를 꺾고자 했다. 육지의 천재와 바다의 천재, 두 사람의 건곤일척(乾坤一擲)이 시작됐다.
나일에서의 전투, 세상을 바꾸다
두 사람의 다음 대결 장소는 이집트의 나일강 하구였다. 이탈리아 원정으로 프랑스의 영웅이 된 나폴레옹의 다음 목표는 이집트였다. 천재와 범인(凡人)의 차이는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이다. 천재 나폴레옹은 이 전쟁은 결국 영국과 프랑스의 대결임을 알았다.
눈앞에 수십만 대군을 자랑하는 오스트리아·러시아·프로이센은 허상일 뿐이고, 프랑스의 진짜 적은 강력한 해군과 광대한 식민지, 막대한 교역을 바탕으로 세계의 경제를 움직이는 영국이었던 것이다. 그 영국의 아킬레스건은 인도 식민지였다. 이집트는 인도로 가는 길목인 동시에 인도 교역의 목줄인 수에즈 해협의 입구였다. 알렉산더 대왕을 동경했던 29세의 청년 나폴레옹은 5만 병력을 이끌고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향했다. 넬슨은 나폴레옹의 목표가 인도의 길목인 이집트라고 확신했다. 그 역시 대국적인 관점에서 전쟁을 바라보는 천재였던 것이다. 나폴레옹을 추격한 넬슨의 함대는 나일강 하구에서 정박해 있는 프랑스 함대를 발견했다. 1798년 8월 1일 오후였다. 어둡기 전 전투가 가능한 시간은 2시간에 불과했다.
넬슨은 속전속결을 선택했다. 전투가 시작됐고 영국 함대는 프랑스 함대를 향해 밤새 포격을 퍼부었다. 다음 날 새벽, 프랑스 함대는 사라졌다. 나폴레옹의 인도 정복의 꿈도, 대영제국의 근간을 흔들겠다는 야망도 물거품이 됐다. 트라팔가르 해전 이전에 넬슨은 이미 나폴레옹의 꿈을 산산이 조각냈다.
200년도 더 된 옛날 일이다. 그러나 지금 내가 타고 있는 빅토리호는 그날을 기억하고 있다. 역사도 잊지 않고 있다. 어떻게 혁명의 열정에 불탄 무적(無敵) 프랑스 군대와 천재 나폴레옹은 영국이라는 벽을 넘지 못했을까? 넬슨이 자신의 '의무'를 다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뱃사람들이 긴 전쟁 기간 동안 넬슨처럼 자신의 자리를 지켰기 때문이다. 결국 위대함은 한때의 열정과 천재 한두 명의 소산이 아니다. 더 많은 사람이 맡은 바 의무를 다했을 때 달성되고 유지되는 것이다. 지금 이 배가 증거다.
[전쟁 영웅이 정박한 곳은 유부녀]
나폴리 英 대사 부인과 외도
딸 낳고 결혼까지했지만 영국은 영웅 위해 외면
유부남이던 넬슨은 에마 해밀턴(1765~1815)을 뜨겁게 사랑했다. 그런데 에마는 나폴리 왕국 주(駐)영국 대사인 해밀턴 경의 아내였다. 에마와 남편(해밀턴 경)과의 나이 차는 36세나 됐다.
나폴리 궁정에서 에마를 처음 만난 넬슨은 그녀와의 사이에서 딸을 낳았다(1801년). 에마와 결혼하려고 이혼까지 했다. 재치와 용기를 두루 갖췄던 에마가 잦은 전투로 심신이 지친 넬슨에게 사랑과 위안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에마의 남편인 해밀턴 경은 두 사람의 관계를 묵인했고, 1803년 죽을 때까지 넬슨과의 우정을 유지했다.
넬슨은 자신의 사후(死後)에 에마와 딸을 지켜주려고 했다. 그러나 영국 사회는 전쟁 영웅을 위해 에마의 그림자를 지웠다. 넬슨의 작위와 재산은 그의 평범한 친척들에게 돌아갔고, 에마는 결국 가난 속에 죽었다.
<출처: 조선일보 2018.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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