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한 우물과 '난타'

부산갈매기88 2009. 10. 5. 10:35

“우물을 파되 한 우물을 파라. 샘물이 날 때까지.” <슈바이처>

 

7세의 나이에 KBS 아역 성우로 연예계에 발을 딛은 연예인 S대표는 교사인 어머니와 영화제작자인 아버지 슬하에서 연기자의 길을 운명처럼 들어섰다. TV 드라마를 비롯한 영화, 라디어 DJ, 음악프로 MC는 물론 CF 등에서 주목을 받았지만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20대 후반은 그의 연기 인생에 시련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예술에 대한 열정과 광대의식을 그를 단돈 3,000달러에 미국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싣게 만들었고, 4년 동안 작품을 찾아 이국의 무대를 섭렵한 뒤 1989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목적은 단 하나, 제대로 된 공연작품을 제작해야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1992년 건국 이래 가장 성공적인 창작 공연예술작품으로 평가받은 ‘난타’의 제작사, PMC 프로덕션의 모태가 된 ‘환 퍼포먼스’를 창단했다.

 

전문 프로듀서 시스템을 도입한 ‘환 퍼포먼스’는 작품에 따라 배우와 스태프를 탄력적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구성해서 운영할 수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극단 운영 시도로 평가되었고, S대표가 추구하고자 했던 ‘기업극단’의 초석이 되었다.

 

물론 가장 어려웠던 점은 자금조달이었다. 1996년 뮤지컬 ‘고래사냥’ 제작비 마련에 고심하던 그는 총비용 7억원 증 1억 원이 부족해 전전긍긍하고 있을 당시 서울 고교 동창이던 L공동대표의 ‘투자’로 성공적인 공연을 마칠 수 있었다. 한 달 후 공연을 마치고 친구에게 빌린 1억 원을 갚아 우정을 보답했다.

 

공연기획과 사업 마인드, 철저한 시장 조사 등 사업가로서 자질을 키우고 있던 S대표는 ‘신용으로 맺어진 비즈니스 파트너십’을 깨닫게 된 소중한 경험이었고, 이를 계기로 두 고교 동창은 기업극단의 가능성과 문화산업의 성장성에 투자하기로 의기투합한다.

 

“친구끼리 사업해서는 안 된다."는 불문율을 깨뜨리고 1996년 12월 자본금 2억 원을 공동 투자하여 종합엔터테인먼트 공연기획사인 PMC 프로덕션을 주식회사로 설립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 10월 세계 시장을 겨낭하여 기획된 비언어행위극 넌버벌(Non-verbal) 퍼포먼스 ‘난타’가 서울 호암아트홀에서 초연되었다. 주방을 무대로 요리사들의 좌충우돌 해프닝을 코믹하게 드라마화한 ‘난타’는 전통 사물놀이가 갖는 타악적 여흥과 리듬이 어우러지게면서 국내 관객들의 호평을 얻었다.

 

S대표는 국내무대에 만족할 수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브로드웨이 공연물 에이전트인 ‘브로드웨이 아시아’를 통해 난타의 해외공연을 추진했지만 해외에서는 검증이 되지 않는 작품이었기 때문에 세계적인 공연예술축제인 영국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 페스티벌’에 참가해 시장의 평가를 받기로 했다.

 

1947년 시작되어 6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이 페스티벌은 세계 정상급의 공식 초청작품들만 참가하는 ‘국제 페스티벌’과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오픈형 ‘프린지 페스티벌’로 나뉜다. 에술성과 실험성을 추구하는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과 달리 상업적인 공연물 유통시장 가능이 강한 에딘버러 축제는 프린지의 경우 극장주들이 예술감독으로 나서 현지 언론과 함께 흥행성 높은 작품을 선별하게 된다.

 

난타는 1999년 8월 프린지 페스티벌에 자비로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3억 원의 ‘출전비용’ 중 문화관광부와 문예진흥원에서 2천만 원을 지원받았지만, 이번에도 1억 원이 부족했던 상황이었다. 이번에도 S대표는 평소 ‘난타’의 세계적인 성공을 확신했던 ‘친구’를 찾았다. 그 친구는 집을 담보로 1억 원을 빌려주며 자기의 아내에게는 절대로 비밀로 하라고 말한다.

 

당시 PMC의 난타 외에도 1,200여 작품이 참가한 에딘버러 프린지 축제였기 때문에 홍보가 성공을 결정짓는 가장 큰 관건이었다. 문제는 3억 원의 경비에 홍보마케팅 비용을 책정할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배우와 스태프의 항공료, 숙박료, 극장 대관료 등을 제하고 나니 예산은 바닥이었다.

S대표와 공연단은 ‘대한민국 공연예술인들의 헝그리 정신’을 기억해냈다. 정부 지원은 물론 기업들도 외면하는 배고픈 연극판에서 작품을 알리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서울 신촌과 대학로, 종로 거리에 포스터 도배질이 전부였다.

 

이 헝그리 근성을 살려 배우와 스태프는 물론 S대표까지 나서 빨간 바탕화면에 4명의 동양인이 식칼을 들고 서 있는 ‘난타 포스터’로 에딘버러 시내 건물에 도배를 해버렸다. 또 페스티벌 역시 52년만에 한국 공연팀이 처음 참가했다는 이유로 축제위원회가 배려한 기자 시사회에 참가할 수 있었다.

 

언론 시사회는 ‘대박’이었고 언론이 부여하는 평점도 최고점을 받았다. 이후 한 달 내내 전회 매진 행렬이 계속되었고 4차례 추가 공연이 이뤄졌다. 해외 공연계획도 줄을 이었다. 2000년에는 에딘버러 국제 페스티벌에 초청되면서 한국의 대표적인 공연예술작품으로 인정받았다.

 

이후 한국을 찾은 관광객을 난타전용관 개관, 연 100억 원 이상의 매출, 400만 달러 규모의 북미투어공연, 브로드웨이 입성, 2007년 10월 탄생 10돌 만에 총매출 700억 원, 공연 횟수 9,957회, 관객 연인원 346만 2,735명을 기록하였으며 2009년 새해에도 여전히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는 중이다. 연기자, 방송인, 공연예술전공 대학교수, 공연기획사 대표, 공연연출가 등 S대표는 ‘기업가 정신’을 가진 성공한 예술인 중 한 분이다.

 

 

비즈 프라임 <부자학>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