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안선 따라 트레킹하기 좋은 ‘어미 섬’ ‘자식 섬’ 100m 출렁다리로 연결돼 한 섬이나 다름없어 ‘연대도 지겟길’ 봄꽃 군락에 취하고 바다 풍경에 반해 만지도의 ‘몬당길’ 동백숲 터널, 느긋하게 걷는 맛 마을 들어서면 집집마다 한편의 詩 같은 문패에 미소 ‘2박3일 춤 춰도 끄떡없는…’ ‘달음박질 잘하는 할머니…’ 주민과 외지인 이어줘 또 다른 재미 마스크 필요없는 봄날 다시 찾고싶은 정겨운 섬 “마스크를 왜 안 해!” 경남 통영의 작은 섬, 연대도의 산길 초입에서 마주친 한 할머니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배에서 내려 호젓한 산길을 걷느라 마스크를 잠시 벗었던 게 탈이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할머니는 정작 마스크를 쓰지 않았습니다. 홀로 인적없는 산길을 걸으면서도 마스크를 써야 하는 걸까. 짐짓 서운했습니다만, 금세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노인들만 사는 작은 섬에서는 지금 모든 것이 위협으로 느껴지는 게 당연한 일이겠지요. 질병관리본부의 설명이 이랬습니다. ‘공기의 흐름이 있고 2m 이상 자연스럽게 거리 두기를 할 수 있는 야외활동은 큰 위험이 없다.’ 통영의 섬을 여행지로 택했던 건 이런 ‘사회적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여행지 중 하나가 ‘호젓한 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섬에 당도하고서야 꼭 그런 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현실적인 감염 가능성뿐만 아니라 주민들이 느끼는 정서적 위협도 충분히 고려해야 할 문제였습니다. 고심 끝에 지금 소개하는 이 두 개 섬에 대한 여행 권유를 유보합니다. 작은 섬 연대도와 출렁다리로 이어진 더 작은 섬, 만지도. 툇마루에 앉아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눈 할머니가 선착장까지 나와 ‘또 오라’고 손을 흔들어주었습니다만 좀 더 시간이 지난 뒤에, 외지인이 섬사람들에게 위협으로 느껴지지 않을 때 다시 오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연대도와 만지도의 봄 풍경을 여기 기록하는 건, 해안선을 따라 걷는 내내 평화롭고 꿈결 같은 섬의 봄날이 흘러가 버리는 게 안타까웠기 때문입니다. 그게 언제일지 모르지만, 일상을 되찾고 여행을 시작하게 된다면 이 두 섬을 꼭 기억해주시길…. # 하나가 된 두 개의 섬 경남 통영이 품고 있는 섬 중에서 가장 이름난 곳이라면 매물도와 사량도다. 매물도는 소매물도의 이국적이면서 낭만적인 풍경으로, 사량도는 암봉으로 이뤄진 망지리산의 산세와 높이가 보여주는 호쾌한 시야로 널리 알려졌다. 여행 좀 해봤다는 사람도 대개 통영의 섬을 여기까지만 안다. 하지만 만춘(滿春), 그러니까 꽉 찬 봄날의 여정이라면 이 두 섬을 뒤로 밀어내고, 당당히 앞자리를 차지해야 마땅한 통영의 섬이 있다. 통영 남쪽 끝에서 배로 15분 남짓. 가까운 바다에 떠 있는 통영의 작은 섬 ‘연대도’와 ‘만지도’ 얘기다. 섬 정상에 봉화가 있었다고 해서 ‘연대(煙臺)’이고 사람들이 늦게 들어와 산 섬이라고 해서 ‘만지(晩地)’다. 연대도와 만지도. 두 개의 섬은 지난 2015년에 100m가 채 안 되는 길이의 보행전용 출렁다리로 연결돼 하나의 섬이나 진배없다. 하지만 섬의 풍경이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봄날에 여기를 가야 하는 이유는 ‘두 섬을 잇는 트레킹 코스’ 때문인데, 경관과 느낌은 물론이고 꽃과 식물까지도 사뭇 달라서 두 섬의 걷는 길은 경쟁이나 병렬이 아닌 보완관계다. 바다를 끼고 봄꽃을 보며 숲을 걷는 내내 지루할 틈이 없다는 얘기다. 우선 섬에 당도해야 하니 가는 방법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자. 연대도와 만지도, 두 섬 다 배가 운항한다. 연대도로 가는 배도 있고, 만지도에 닿는 배도 있다. 다리로 연결된 두 섬의 선착장 사이 거리는 600m 남짓. 어찌 보면 한 섬이나 다름없으니 어디로 들어가든 상관없다. 두 섬을 다니는 배는 같은 종류는 아니다. 연대도까지 운항하는 건 달아항에서 출항한 카페리 여객선이고, 만지도를 오가는 건 연명항에서 뜨는 작은 유람선이다. 배는 여객선과 유람선으로 나뉘지만, 둘 다 정해진 시간에 정기편으로 배를 운항하고 있으니 손님 입장에서는 뭐 별다를 게 없다. 다른 게 있다면 요금과 소요시간이다. 달아항에서 뜨는 여객선은 주변 섬 두어 곳을 들러가는 대신 연대도까지 가는 운임이 저렴하고(그래 봐야 차이는 2000원이다), 연명항에서 뜨는 유람선은 운임이 좀 비싼 대신 곧바로 만지도까지 간다.
# 섬마을의 집들 시(詩)를 문패로 달다 연대도에서 내리든, 만지도에서 내리든 섬에 내려서 마을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게 대문 옆에 내건 문패다. 이름만 덜렁 적어 놓은 평범한 문패가 아니라 문패에는 간결한 문장으로 집주인의 성품이나 이력까지 담겨 있다. 연대도의 문패는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딸 일곱을 둔 이도태 할아버지 집의 문패를 보자. “관광버스에서 이박삼일 동안 춤을 추어도 끄떡없습니다. 두릅 농사를 많이 지으십니다.” ‘인상 좋은 이상술 할아버지’의 문패 글은 이렇다. “국제적인 마도로스로 세계를 여행하셨습니다. 쪼그리고 앉아 식사를 하시는 습관이 있으십니다.” 하나 더 보자. 서태동, 정상영 부부 집 앞의 문패다. ‘정치망어업을 하는 부부의 집. 민박도 합니다. 민화투를 즐기시는 이야무 할머니와 함께 사십니다.’ 문패는 한 편의 짧은 시와 같다. 만지도 마을의 문패도 비슷하지만 결이 조금 다르다. 만지도의 문패 몇 개를 읽어보자. ‘양식업으로 대통령 훈장을 받은 어르신 댁’ ‘우리나라 최초 3관왕 카누선수가 태어나고 자란 곳’ ‘만지도 최고령할머니댁’…. 눈치채셨는지. 연대도의 것과 비슷해 보이지만, 만지도의 문패는 ‘객관적인 사실’이 주로 담겼다. 반면 연대도의 문패는 집주인의 사정이나 살아온 내력 따위를 속속들이 알지 못하면 적을 수 없는 이야기가 주로 담겨 있다. 더 가깝고 살갑게 느껴지는 건 연대도의 문패다. 연대도와 만지도의 문패가, 그냥 문패가 아니라는 건 골목을 기웃거리며 읽다 보면 저절로 느끼게 된다. 문패로 읽어 알게 된 그 집 주인의 손톱만 한 정보가 마술과도 같이 인연의 끈이 된다. 이를테면 ‘달음박질을 잘하시는 감막동 할머니가 사신다’는 문패를 읽고 나서 그 문패가 걸린 집의 대문을 삐걱 열고 나온, ‘김막동 할머니임이 분명한’ 어른에게 어찌 인사를 안 할 수 있을까. 문패가 없었다면 데면데면했을 섬 주민과 외지인이 문패에 적은 문장 하나로 인사와 대화를 주고받게 되는 것이다. 작은 섬을 여행하는 재미는 이런 데 있다.
# 두 섬을 이어붙여 걷는 길 다시 강조하지만, 연대도와 만지도가 지닌 매력은 섬의 해안선을 따라 걷는 트레킹에 있다. 연대도에는 해안 오솔길을 따라 섬 한 바퀴를 걸어 되돌아오는 ‘연대도 지겟길’이 있고, 만지도에는 봄볕 환한 구릉 너머 섬 끝까지 갔다가 어둑한 동백 숲 터널을 걸어 되돌아오는 ‘몬당길’이 있다. 지겟길이란 섬사람들이 지게를 지고 산을 오르내리며 다니던 길이라서 붙여진 이름이고, 몬당길은 고개의 사투리인 ‘몬당’에서 나온 길 이름이다. 두 길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어떤 배를 타는지에 따라 둘 중 어느 섬에서부터 트레킹을 시작할지 결정되겠지만, 여기서는 두 섬 중에서 크기로 보나 인구로 보나 ‘어미 섬’이라고 할 수 있는 연대도 얘기부터 시작하자. ‘연대도 지겟길’은 한려해상국립공원이 통영의 6개 섬에 조성한 ‘바다백리길’ 코스 중의 하나다. 총 거리는 2.5㎞ 남짓. 바다백리길 중에서는 가장 짧은 구간이라지만, 그래도 여유 있게 걷는다면 2시간쯤 걸린다. 이즈음이라면 필시 그보다 더 오래 걸린다. 지겟길의 주인공은 바다와 봄꽃이다. 봄 바다의 색이 워낙 매혹적인 데다 걷는 길섶에서 봄꽃들이 군락을 이룬 채 만발해있어 그 앞에 자주 멈춰 설 수밖에 없다. 난대림의 이파리로 반짝거리는 지겟길에는 벌써 무성한 봄의 초록이 당도해 있다. 숲을 물들인 초록의 채도로만 보면 봄이 아니라 여름의 초입이라 해도 믿어질 정도다. 지겟길의 풍경은 조화롭다. 먼 것과 가까운 것의 풍경이 이리 잘 어울릴 수 없다. 지겟길의 원경(遠景)은 봄 바다, 중경(中景)은 난대림과 살구꽃, 근경(近景)은 봄 야생화다. 바다와 꽃, 그리고 그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가슴이 탁 트이는 전망대도 있고, 차르르 차르르 파도에 몽돌이 구르는 바다도 있다. 봄이면 연대도 지겟길 주위는 양지꽃이며 갖가지 제비꽃, 개별꽃, 냉이꽃 등이 뒤덮는다. 연대도의 봄꽃은, 유독 무리를 짓는다. 같은 꽃이 한데 모여 점령군처럼 피어난다. 제비꽃도, 별꽃도, 현호색도 그렇다. 군락을 이룬 꽃이 가장 화려한 곳은 지겟길 중간쯤의 어둑한 숲이다. 그곳에는 지금 보랏빛부터 파란색까지 채도가 조금씩 다른 현호색이 꽃밭을 이루고 있다. 만지도의 트레킹 코스는 연대도의 지겟길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봄꽃도 좀 다르다. 만지도의 능선은 온통 산자고로 뒤덮이다시피 했다. 지겟길이 가벼운 등산 수준의 트레킹이라면 만지도의 몬당길은 뒷짐을 지고 느긋하게 소요하는 산책에 더 가깝다. 몬당길을 다 걷는 데는 1시간 정도 걸리는데 절반의 코스는 시야가 탁 터지는 섬의 부드러운 능선구간이고 나머지 절반 코스는 짙은 동백숲 터널이다. 유채꽃 하늘거리는 능선에서 바다를 보며 걷는 것도 좋고, 떨어진 붉은 동백꽃으로 온통 낭자한 어두운 동백숲 터널도 훌륭하다. 만지도에서 연대도를 건너는 출렁다리까지 가는 길은 바다에 기둥을 박아서 덧댄 나무 덱으로 이어져 있는데, 이 길 위에서는 한쪽은 해안벼랑의 붉은 동백을, 다른 한쪽은 맑고 푸른 바다를 끼고 걷는다.
# 섬이 주민들에게 소중한 이유 연대도는 트레킹 코스가 제법 이름이 나서 인근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는 찾는 이들이 많지만, 외지인들에게는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섬이다. 이제 연대도가 품고 있는 내력에 대해서 살펴보자. 연대도는 사패지(賜牌地)였다. ‘사패지’가 무슨 뜻일까. 한자의 뜻을 새겨보자. 사패지란 준다는 뜻의 ‘사(賜)’에다 호패 할 때의 ‘패(牌)’ 그리고 땅 ‘지(地)’를 쓰는데, 고려·조선 시대에 임금이 내려 준 논밭을 말한다. 임금이 나라에 공이 있는 사람이나 기관에 하사하고 그 지배권을 문서로 보증해준 땅이 사패지다. 연대도는 숙종이 하사한, 충무공 이순신을 제사 지내는 사당 충렬사의 사패지였다. 연대도 30여 마지기의 밭에서 나는 곡식으로 충렬사가 지내는 충무공의 제사 비용을 충당했다. 연대도 섬 주민 모두가 충렬사의 땅을 부쳐 먹는 소작인이었던 셈이다. 섬사람들은 각고의 노력 끝에 1987년에서야 사패지로 지정된 땅값을 공시지가대로 지불하고 제 땅으로 만들었다. 연대도가 사패지가 된 게 1718년이었으니 자그마치 269년 만의 일이었다. 연대도 마을 한가운데에는 사패지를 면(免)했다는 것을 기념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섬사람들이 제 땅을 갖게 된 감격에 비하면 비석의 크기는 작다. 척박한 섬에서 소작농으로 일한 섬사람들의 고초는 짐작이 되고도 남지만, 소작료가 다른 데도 아니고 충무공의 제사에 쓰였다니 목청을 높이기도 조심스러웠던 탓이겠다. 아무튼 섬에 제 땅을 갖게 되면서 연대도 주민들은 비로소 소작의 가난에서 벗어났다. 비로소 사들여 제 것이 된 땅이 섬사람들에게 얼마나 소중했을 것인가. 이런 내력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건 연대도 주민들의 섬에 대한 애정이다. 그 애정이야말로 연대도가 지금처럼 ‘단정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는 바탕이다. # 오래도록 가고픈 섬이 될 수 있을까 폄훼하자면 ‘관변 시민단체’쯤이었는데도, 푸른통영21은 열정적인 활동가들의 활약으로 지역 도시재생사업 분야에서 탁월한 성과를 거뒀다. 재개발로 사라질뻔한 통영의 동피랑을 벽화 마을로 가꿔 전국적인 명소로 만들어 살려낸 게 대표적 사례다. 이어 작은 섬 연대도를 ‘화석에너지 제로섬’이란 메시지를 부여해 매혹적인 섬으로 가꿔냈다. 하지만 이런 눈부신 성과에도 불구하고 푸른통영21은 2015년 당시 통영시장과 마찰을 빚다가 석연치 않은 이유로 해산되고 말았다. 연대도에는 푸른통영21이 마을 주민과 함께 만든 에코체험센터가 있다. 폐교를 대안에너지 체험공간으로 만든 곳이다. 이곳에서는 자전거로 발전기를 돌려 노래방기기를 가동하거나 솜사탕을 만들고, 태양열로 음식을 조리해 보는 체험 등을 해볼 수 있다. 연대도에 이런 시설을 들인 것은 ‘지속 가능한 섬 개발’의 모델을 일구려는 의도였다. 겨울에도 별도의 난방 없이 지낼 수 있는 패시브하우스 공법으로 마을회관과 경로당을 짓고, 마을 뒤편에 태양광 발전기를 설치한 것도 그래서다. 에너지 감축이란 취지에 동감하거나 섬 재생사업으로 잘 가꿔진 섬마을과 섬 둘레 걷기 길의 매력을 알게 된 관광객들이 늘어나면서 섬 주민들의 소득은 크게 늘었다. 하지만 푸른통영21이 해산된 후 화석에너지 감축이란 애초의 메시지는 희미해지고 있다. 상시 개방했던 에코체험센터도 단체 관광객이 올 때나 겨우 문을 열어주는 곳이 됐다. 사실 연대도는 단번에 눈에 확 띄는 명소를 가진 건 아니다. 섬에 스며든 시간과 작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눈, 그리고 섬사람들과의 교유와 공감이 있어야만 연대도와 만지도의 매력을 진정 이해할 수 있다. 그러자면 섬은 스스로 추구하는 ‘가치’가 명료해야 한다. 그 가치를 섬은 다시 가질 수 있을까. 앞으로도 오래도록 가고 싶은 곳이 될 수 있을까. ■ 섬 여행의 부록, 통영의 노을 통영의 연명항에서 유람선을 타고 만지도로 들어간다면 돌아 나오는 길에 꼭 들러보길 권할 만한 곳이 있다. 펜션을 겸하는 카페 ‘미스티크’다. 늦은 오후에 미스티크에 가면, 커피 한 잔 앞에 두고 바다가 온통 낭만적인 노란색으로 물들다가 장엄한 붉은색으로 변하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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