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식민지 시절 아픔 간직한 땅 '목포' 트로트 가락따라 한맺힌 눈물 딱고 '치유의 길'을 찾다

부산갈매기88 2020. 6. 18. 08:32


호남선 종착역이자 국도1·2호선의 출발점…

일제강점기 첨단 유행이 휩쓸던 모던한 항구

식민지 수탈의 역사도 곳곳에 새겨져


목포역 남쪽 곳곳엔 적산가옥 등 근대 건축물

보육원인 ‘공생원’엔 한일 우호 상징 매화나무도

두 나라가 공동의 미래를 말할 수 있는 날은 올까…



전남 목포는 일제에 의해 개항한 게 아니라 조선이 자발적으로 개항한 도시라고는 하지만, 부산이나 인천, 군산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의 만행과 수탈의 역사가 깊게 새겨져 있습니다. 목포에는 그러나 일제강점기 식민지의 과거만 있는 건 아닙니다. 뜻밖에 한국과 일본이 서로 이해하고 교유하던 때의 기억이 새겨진 곳도 있습니다. 그곳에는 20년 전쯤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전 일본 총리가 보낸 스무 그루의 매화나무가 자라고 있습니다. ‘목포의 눈물’의 트로트 곡조를 배경으로 근대의 이야기를 따라 목포에 다녀왔습니다.


# 시간이 바뀌면 중심도 달라진다

목포는 ‘끝’이기도 하고, 때로는 ‘시작’이기도 하다. 철로에서 볼 때의 목포와, 도로에서 볼 때의 목포는 다르다. 철도의 호남선 종착역은 목포역. 철로 위의 기차에서 보는 목포는 ‘끝’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도로는 사정이 다르다. 국도 1호선과 2호선의 기점, 그러니까 출발점이 목포다. 여기서 출발한 국도 1호선의 종점은 신의주이고, 국도 2호선의 종점은 부산이다. 도로 위의 차량에서 보는 목포는 ‘시작’이란 얘기다.

목포의 중심은 어디일까. 지금은 목포 근대역사관으로 활용되고 있는, 일본인이 붉은 벽돌로 지은 옛 목포 일본영사관 앞이다. 여기에 목포의 중심을 알리는 도로원표가 있다. 원표는 도시 간 거리를 재는 기준이 되니, 원표가 있는 곳은 도시의 중심인 셈이다. 원표 바로 뒤에 국도 1, 2호선의 기점을 알리는 큼지막한 비석이 있다. 하지만 여기가 진짜 국도 1, 2호선의 시발점은 아니다. 과거에는 그랬지만 바다를 건너는 다리가 놓이면서 1, 2호선 국도의 시발점도 뒤로 물러났다. 국도 2호선 기점은 이미 지난 2001년에 98㎞나 뒤로 물러난 신안군 장산면으로 옮겨졌고, 국도 1호선의 기점도 2012년 고하도로 옮겨갔다. 시대가 달라지고 길이 달라지니 시작과 끝도 달라지게 된 것이다.

국도의 시발점이 옮겨간 뒤 옛 목포 일본영사관 앞 도로에 서 있는 ‘국도 1, 2호선 시발점’이라 새겨진 비석을 그냥 둬야 하는지가 고민스러웠을 것이다. 그냥 두자니 국도 시발점이 아닌 곳에 시발점 비석을 세워놓은 꼴이 되고, 그렇다고 도시의 오래된 기념물이 된 비석을 헐어버릴 수도 없는 노릇. 고심 끝에 비석의 ‘국도 1, 2호선 시발점’ 옆에다 작은 글씨로 ‘기념비’라는 글씨를 추가로 적어넣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본래는 그 자리가 국도의 기점이라는 것을 알리는 비석이었는데 ‘국도 1, 2호선 시발점 기념비’가 되면서 그곳이 ‘한때 국도의 기점이었다는 것을 기념하는 비석’으로 탈바꿈한 셈이었다. ‘기념비’란 세 글자가, 마술처럼 비석이 기념하고 있는 사실이 과거형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세월에 따라 길이 바뀌고 그 길을 기념하는 이름이 바뀌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 하지만 목포에서는 다양한 의미를 함의하는 상징으로 읽힌다. 그건 목포가 바로 식민지 시절의 기억이 깊이 새겨진 도시여서 그렇다.


# 근대 역사문화공간과 옥단이길 위에서의 다양한 인물들

목포를 여행하다가 자주 착각하는 것은, 목포가 과거에도 지금처럼 낙후된 소도시였을 거라고 지레짐작한다는 점이다. 일제강점기 목포는 지금의 목포와는 전혀 달랐다. 그때 목포는 외국의 선진문물을 향해 열려있던, 첨단 유행이 휩쓸던 모던한 항구 도시였다.

목포에서 일제강점기 건축물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 목포 개항 후 각국 거류지였던 목포역 남쪽의 대의동과 용해동 일대다. 한 눈에도 역사가 보이는 근대 건축물이 곳곳에 있는 데다, 1970년대쯤에 들어선 낡은 건물들이 개발지체를 드러내는 남루한 형상으로 서 있어 시대를 마구 뒤섞어 놓은 듯한 느낌이다. 근대의 느낌이 짙은 골목은 제법 돌아보는 재미가 있다. 골목은 아직도 살아서 움직인다. 낡고 오래된 적산가옥은 이른바 ‘도시 재생’의 이름으로 카페나 게스트하우스, 빵집이 되고 있는 사이에 80년 넘는 역사의 ‘갑자옥 모자점’을 비롯한 골목의 노포들은 문을 닫고 있다. 가게를 지키던, 가게만큼 늙은 가게 주인이 이제 힘에 부쳐 하나둘 폐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목포의 근대 역사문화공간이 널리 알려진 건, 지난해 불거진 손혜원 전 의원의 부동산 투기 논란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개발 계획을 미리 알고 끼리끼리 목포의 근대건축물을 매입한 것이 투기냐 아니냐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면서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크게 늘었다. 특히 손 전 의원의 조카가 운영한다는 게스트하우스는 일약 명소가 됐다. 관광지로서는 뜻하지 않은 후광효과를 누린 셈인데, 그렇다고 그걸 반길 수만은 없는 것이 손 전 의원의 투기 논란 이후에 도시재생 사업이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손 전 의원의 투기논란으로 주목받은 목포역 근처의 근대 역사문화공간은,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 거주지거나 각국 거류지다. 조선인들이 살았던 유달산 북쪽의 목원동과 양동 일대는 같은 시대를 건너왔지만 근대의 흔적이 흐릿하다. 재개발 주택이 빼곡하게 들어서 일제강점기의 자취를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야기는 차곡차곡 쌓여있다. 그 이야기를 따라가는 도보 길이 ‘옥단이길’이다. 온갖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물지게를 지고 씩씩하게 살았던 실존 인물 ‘옥단이’의 이름을 딴 이 길은 목포 오거리와 먹통시장으로 이어지는 4.6㎞ 남짓의 코스다.

옥단이길 위에서는 일제강점기를 산 다양한 근대의 인물들이 튀어나온다. 반일과 친일로 양단되지 않는, 영웅도 아니고 그렇다고 발끝까지 악당이라고도 할 수 없는 인물들이 적잖다. 그중 한 명이 일본 경찰이었던 구종명이다. 조선인이면서 일본 경찰이었던 그는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 분쟁이 생기면 법률지식이 없는 조선인을 앞장서 대변했다. 그를 기리는 비석이 죽동의 초원빌라 담벼락에 남아있는 이유다. 하지만 그는 훗날 경북 영해 군수를 역임했고 한국병합기념훈장과 천황즉위기념훈장까지 받는 반민족행위자로 전락했다. 일본인을 상대로 숱한 사기행각을 벌여 목포 유달산까지 일본인에게 팔아먹었다는, 현대판 ‘봉이 김선달’ 정병조도 비슷한 경우다. 그는 조선 총독 앞에서 금으로 만든 명함으로 환심을 산 뒤 조선총독부를 배경으로 각종 이권에 개입해 부를 축적했다.


# 목포는 항구다… 트로트의 힘

목포는 항구다. 부산도, 여수도 항구지만 ‘목포는 항구다’라고 말할 때의 이 문장은 입에 착 감기고 완벽해진다. 가수 이난영의 노래 ‘목포는 항구다’의 힘이다. 이 곡보다 더 대표적인 곡이 다들 아는 ‘목포의 눈물’이다. 손인호 노래 ‘비 내리는 호남선’은 또 어떤가. 트로트 곡조의 서정이 목포만큼 잘 어울리는 곳이 또 있을까.

유달산의 대학루 아래에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있다. 목포의 상징인 유달산에 세운 대중가요 최초의 노래비다. 1969년 목포악기점을 운영하던 박오주(당시 66세)가 사재를 털어 세웠다. 그는 왜 노래비를 세울 생각을 했을까. 전해지는 기록이 없으니 짐작할 따름이다. 목포 사람들에게 ‘목포의 눈물’은 그냥 유행가가 아니다. 처연하고 서러운 이별의 노래지만, 이 노래는 해태 타이거즈의 응원가로도 불렸다. 승리의 기쁨이 아니라 가난했고 소외된 설움과 한(恨)으로 팬들은 이 노래를 불렀다.

‘목포의 눈물’의 가수 이난영이 태어난 곳은 유달산 아래 양동의 언덕이다. 옥단이길 코스에서 멀지 않다. 생가가 헐린 삼각형의 빈터에는 이난영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흉상 아래는 어김없이 ‘목포의 눈물’ 노래 가사가 적혀있다. 목포에는 그가 잠들어있는 곳도 있다. 근래에 물길을 뚫어 복원한 삼학도의 세 개 섬 가운데 가장 큰 섬인 대삼학도 산허리에 이난영공원이 조성돼 있는데, ‘목포의 눈물 기념사업회’가 2006년 경기 파주의 용미리에서 그의 유해를 가져다 공원의 배롱나무 아래에 수목장을 지냈다. 열일곱에 데뷔해 당대 최고의 스타 자리에 올랐다가 41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이난영의 유해가 거기 뿌려진 것이다. 배롱나무 앞에는 ‘목포의 눈물’과 ‘목포는 항구다’의 노래비가 있다. 노래비 앞에서는 하루 종일 ‘목포의 눈물’ 노래가 흘러나온다. 구성지게 넘어가는 노래는 모두 후배 가수들이 부른 것이다. 남진의 목소리도, 주현미의 목소리도 들린다.


# 함께 사는 집… 공생원에 새겨진 뜻

목포 여정의 마지막 목적지를 제안하기에 앞서 다른 얘기를 좀 해보자. 퇴행적인 역사인식의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와는 여러모로 대척점에 서 있는 일본의 정치인이 오부치 게이조 전 일본 총리다. 오부치 전 총리는 1998년 10월 김대중 당시 대통령과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한·일관계의 바람직한 정립을 얘기할 때마다 거론되는 이른바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이다. 오부치 전 총리는 이 선언에서 과거 식민지배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 사죄한다’고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일본 총리가 외교 문서를 통해 우리나라를 콕 짚어 공식사죄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를 높이 평가해 한·일 양국의 미래지향적 동반자 관계를 약속했고, 이로 인해 한·일관계가 새 지평을 열었다. 그 오부치 전 총리가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에 선물로 보낸 스무 그루의 매화나무가 목포에 있다. 오부치 전 총리의 고향 군마(群馬)현의 매화나무가 대한해협을 건너와 올해로 스무 번째의 꽃을 피운 사연이 이렇다.

목포에는 ‘공생원’이 있다. 공생(共生), 그러니까 ‘함께 산다’는 뜻의 이름을 내건 보육원(고아원)이다. 일제강점기인 1928년 부모 잃은 7명의 아이와 공동생활을 하던 열아홉 살의 전도사 윤치호가 세웠다. 손수 벽돌을 굽고 나무를 잘라 집을 지었으며 거리의 고아를 데려다가 입히고, 먹이고, 가르치던 윤치호는 공생원을 찾아와 자원봉사를 하던 여학교 음악교사 일본 여성 다우치 지즈코(田內千鶴子·한국 이름 윤학자)와 결혼했다.

한국인 남편과 일본인 부인은 역사의 소용돌이가 몰아칠 때마다 덫에 걸렸다. 고아원 운영의 어려움은 사치스러운 얘기일 따름이었다. 해방 이후에 윤치호는 일본인 부인을 두었다는 이유로 친일파로 몰렸다. 해방 후 혹여 남편이 친일분자로 몰려 해라도 입을까 싶어 이듬해 가족과 일본으로 돌아갔던 윤학자 여사는, 남편과 공생원 아이들이 눈에 밟혀 두 해 만에 목포로 돌아왔다. 친일파의 누명은 벗었지만, 6·25전쟁 때 공산치하에서는 반동분자로, 국군에게는 부역자로 몰렸다. 해방된 조국에서 반역행위자로 투옥됐던 윤치호는 석방 이틀 만에 원생들에게 줄 식량을 구하러 부산으로 갔다가 그만 행방불명됐다. 주검조차 수습되지 않은 실종이었다.


# 오부치 전 일본 총리가 보낸 매화 스무 그루의 사연

남편이 행방불명되는 청천벽력의 상황에서도 윤 여사는 공생원을 혼자 꾸렸다.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그는 아이들을 보살피는 데 평생을 바쳤다. 한국 정부는 1963년 그에게 문화훈장을 수여했고, 일본 정부도 1967년 공공업무에 공이 있는 사람에게 주는 남수(藍綬) 포장을 줬다. 식민지배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한·일 양국으로부터 훈장과 포장을 받은 흔치 않은 경우였다. 1968년 윤 여사가 과로로 타계한 이후에도 공생원은 아들과 손녀로 이어지면서 지금까지 4000명이 넘는 부모 없는 아이들을 길러냈다.

윤 여사에서 장남 윤기로, 그리고 손녀 윤록(일본명 다우치 미도리(田內綠))에게로 공생원이 이어진 사연이 일본 NHK TV에 다큐멘터리로 소개된 적이 있다. 이 다큐멘터리를 본 당시 일본 총리 오부치는 윤록 공생원 원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TV에서 보고 감동받았다”며 “꼭 한번 목포를 찾아가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앞서 얘기했듯이 오부치 당시 총리는 2000년 3월 자신의 고향이자 매화의 고장으로 알려진 군마현의 매화나무 묘목 스무 그루를 공생원에 기증했다. 그런데 총리는 목포를 방문하지도, 자신이 기증한 나무에 매화꽃이 피는 것도 보지 못했다. 묘목을 보낸 다음 달에 뇌경색으로 쓰러져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공생원은 2008년 창립 80주년 기념행사에 오부치 전 총리의 부인 오부치 지즈코(小淵千鶴子)를 초청했다. 부인은 이날 행사에서 “남편이 보낸 스무 그루 매화나무가 양지바른 곳에 심어져 잘 자라고 있는 것을 볼 때나, 그 나무에서 꽃이 피고 열매가 달릴 때마다 제 남편을 기억해줄 것이라고 생각하니 감사하다”고 소감을 말했다.

공생원에는 1949년에 창립 20주년을 기념해 마을 주민들이 세워준 기념비도 있고, 목포시민들의 성금으로 세운 ‘사랑의 가족 기념비’도 있다. 경향신문사가 ‘국민이 주는 희망의 상’ 수상자로 윤 여사를 선정했으나 급작스레 세상을 떠나자 상 대신 세운 기념비도 있다. 일본과의 우호 징표도 곳곳에 있다. 오사카(大阪) 시민들의 모금으로 지어진 아동 숙소인 ‘오사카 사랑의 집’이 있고, 일본항공(JAL) 회장이 기증한 집이 있으며 일본 교회의 지원으로 주춧돌을 놓은 주거동도 있다. 자그마한 정원에는 일본 자민당 간사장, 윤 여사의 고향인 고치(高知)현 지사, 주한 일본대사 등이 방문 기념으로 심은 나무가 자라고 있다. 저물 무렵 공생원을 둘러보다 생각한다. 한국과 일본, 두 나라가 서로를 이해하고 공동의 미래를 말하는 때가 다시 올 수 있을까.


■ 목포를 즐기는 방법이 다양해진다

올해 초 지역관광 거점 도시로 선정된 목포시가 지난해 해상케이블카와 고하도 전망대를 개장한 데 이어 이달에 다양한 관광 시설을 한꺼번에 새로 선보인다. 먼저 12일 삼학도에 여수의 낭만포차를 벤치마킹한 ‘항구포차’를 열고, 같은 날 삼학도 선착장을 출발해 갓바위, 장좌도, 목포대교 등을 돌아보는 관광유람선 운항을 시작한다.

문화일보 202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