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

<싱가포르 리콴유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

부산갈매기88 2010. 4. 26. 08:50

 

싱가포르하면 떠오른 사람은 리콴유다. 한국에 박정희가 있었다면 싱가포르에는 리콴유가 있는 것이다. 박정희와 리콴유는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으로 리콴유(1923년~) 박정희 보다는 6살 아래다.

 

싱가포르는 1960년대 중반 말레이시아 연방으로부터 독립하였다. 독립당시 부존자원은커녕 가장 기본적인 마실 물조차도 부족해서 이웃나라인 말레이시아로부터 대형 송수관으로 공급받아야 했고, 연 평균 인구증가율은 당시 세계 최고수준이라고 할 수 있는 연 4%대에 달한데다가 ‘공식적인’ 실업율만 12%가 넘던 상황이었다.

 

게다가, 작은 도시국가답지 않게 여러 민족들이 뒤섞여 살고 있어 인종폭동까지 발생할 정도로 갈등과 반목이 아주 심했었고, 공산주의자들은 혼란을 틈타 정권전복을 노리던 불안한 시대였다.

 

35세에 초대 총리가 되어 그는 3가지 큰 국가 전략의 밑그림을 그렸다. 부정부패 없는 깨끗한 공직사회, 파업 없는 근로자, 세계적인 수준의 엘리트 그룹 양성이다.

그가 집권한 뒤 가장 먼저 펼친 정책은 정부재정의 건전화였다. 고위공무원들의 봉급을 자진삭감해가면서 재정적자를 흑자로 반전시키려고 노력했으며, 당시 무주택자가 대부분을 차지하였던 현실을 감안하여 주택개발청(HDB)을 설립, 일종의 영구임대아파트를 대량으로 건설하여 서민층의 생활을 안정시키려 노력했다.

 

또한, 싱가포르의 고질적인 병폐였던 부정부패를 근절하기 이한 강력한 정책을지속적으로 펴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공직비리조사국(Corrupt Practices Investigation Bureau : CPIB)’의 설치, 운영이었다.

 

그는 공무원 사회의 부정부패 척결을 위해 공무원 사회와 빅딜을 맺어 공무원의 봉급을 2배로 올려주는 대신 단 1원의 부정한 돈도 가혹하게 처벌하였다.

 

그는 또 노동 단체들과도 빅딜을 하여, 근로자들에게 거의 무상에 가까운 조건으로 주택을 공급해주는 대신 강성 노조를 무력화시켰다. 그러자 외국 기업들이 앞다투어 싱가포르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동서고금의 요충지에 위치한 지리적 장점과 영국 식민지 아래에서 영어가 불편 없이 통한다는 점이 강점으로 작용했다. 무엇보다 정직한 공무원, 강성 노조가 없는 작업장이라면 최적의 투자처가 될 것으로 확신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비한다면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강성 노조가 기업의 운명을 좌우하고, 목에 칼을 들이대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리콴유는 국민과의 소통에도 앞장섰다. 싱가포르 건국 초창기의 극심한 혼란에 염증을 느낀 그는 집회, 시위에 대해 엄격한 규제를 가했지만 한편으로는 국민들과 여러 경로로 직접 대화를 나누면서 국민들의 불만, 건의사항을 정책결정과정에 적극 반영하기도 하였다.

 

경호원도 동반하지 않은채 싱가포르 항공(Singapore Air Line) 사옥 안의 직원용 수영장에 찾아가서는 말단 직원들과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깨끗한 거리를 조성하기 위해 무더운 날씨에도 손수 빗자루를 들고 나서서 반나절 가량이나 길거리 청소에 앞장서기도 했다.

 

또한, 싱가포르 인구에서 소수를 차지하는 말레이계, 인도계의 권익 향상과 복지증진에도 노력을 하는 등, 싱가포르 내 각 민족 간의 화목과 단합을 위한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고, 그 결과 예전에 비해 인종갈등문제가 많이 개선되었다.

 

리콴유는 검소함을 실천한 총리였으며 가족, 친인척 등 주위를 깨끗하게 정리한 총리였다. 어느 기자가 싱가포르 국립극장에서 열리는 공연을 보러갔다가 다섯 번째 줄에 앉은 노부부를 보았는데, 알고 보니 그들은 당시 현직 총리였던 리콴유의 부모였다. 아들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총리임에도 불구하고 그들 노부부는 1등석도 아닌 일반석에 앉아서는 평범한 시민들처럼 공연을 보고 있었고, 그들 노부부는 기자의 질문에 “내 아들이 총리인거랑 극장 1등석이랑 무슨 상관이 있느냐?”며 오히려 반문했다고 한다. 어떠한 특권도 거부하는 그런 모습에 기자는 경탄을 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리콴유의 아버지는 아들이 총리자리에 오른 뒤에도 70세가 넘도록 작은 시계수리점을 경영하며 평범하게 살았다. 리콴유의 일가친척이나 인척 중에서 ‘별다른 경력이나 능력도 없는’ 이가 고위직에 오르거나 한 사례는 전무하다.

 

리콴유는 외국 방문이 잦은 편인데 그때마다 전용비행기나 전세기가 아닌 일반 정기항공편을 이용했다. 상당수 제3세계 국가의 지도자들이 가난한 나라살림에도 불구하고 값비싼 전용비행기를 구입하여 해외순방시의 이용하는 것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리콴유는 인재양성에 힘썼다.

자원이 부족한 나라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은 장기적인 인재양성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초등학교 상급반부터 영재를 선발하여 이들이 고교를 졸업할 때면 전원 국비 장학생으로 선발하여 선진국에 유학을 보냈다. 오늘날의 싱가포르가 이끌고 있는 엘리트 그룹들은 이렇게 탄생된 것이다.

 

이제 지방자치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들도 영안을 가지고 지도자 선택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자신의 사리사욕과 당리당략에 얽매인 지도자인지, 아니면 이 지역과 민족을 위해서 헌신할 수 있는 지도자인지를 잘 봐야 한다.

 

우리가 그릇도 안 되는 사람을 뽑아놓고 훗날 피눈물 흘리며 그들을 안주거리 삼아서 욕할 게 아니라 정말 능력이 있고 이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인재를 뽑아야 한다. 그 놈이 그 놈일 것 같지만, 차이는 엄청나다. 우리는 이제 능력과 가능성, 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개혁자에게 정당한 한 표를 행사해야 한다.

 

적어도 대한민국에 산다고 자부한다면!!!